덕흥 대원군         작성일자; 2015.05.08.금요일,맑음 

 

덕흥대원군(생졸;1560년4월2일~1559년6월14일)은

조선 중기의 왕자이며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며 휘는 이초,아명는 이환수이다.

 

조선 제14대 선조의 사친으로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촌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는 당시 적서를 가리던 그 시대에,중종 임금의 서자였고,

선조는 서얼 콤플렉스와 방계승통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하다.

순조 때 왕족 아들의 수가 귀해지자 선조의 왕자군 후손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적용시켰다가

결국 뒤이어 덕흥대원군의 직계 후손들에게도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였다.

 

덕흥 대원군은 궁궐에서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서9남이자,

증 의정부 좌이정에 추종된 안탄대의 딸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친형제로는 영양군 이거,정신옹주가 있다.

처음 이름은 이환수였다가 뒤에 이 초로 개명하였다.

1538년,중종33년 덕흥군으로 책봉되었다.

1542년,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손자로 지중추부사와 판중추부사를 지낸 정세호의 딸인

하동 정씨와 가례를 올리고 출궁하였다.

그의 집이었던 도정궁은 처음에 한성부 사직동 근처에 있었다.

1955년4월23일,당대의 고관 몇 명과 사대부들과 시비가 붙고,

기생들과도 어울려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아 무마되었다.

1954년3월에는 덕흥군의 집 노비들과 그의 장인인 정세호의 집 노비들끼리 시비가 붙어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당했으나 역시 명종 무마시켰다.

1559년 명종14년,6월14일에 향년 30세를 일기로 병사하여,

그 해 9월17일에 경기도 양주군 남면 수락산 언덕에 예장하였다.

 

생전 명종에 의하면 그는 무식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1567년.명종13년.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이 후사없이 죽은 명종 뒤를 이어 조선

14대 왕인 선조로 즉위했다.

중종 이후 외척의 발호에 부정적이었던 신하들은 명종의 하성군 낙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바로 동의하였다.

선조는 즉위 후 번번히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삼사는 선조가 덕흥군의 아들이 아닌 명종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받아 즉위했음을 이유로 들어

덕흥군의 추존을 반대하였다.

1569년.11월1일.

선조2년에 선조는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을 추존하는 고사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으로,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하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하려면 황백부모를 칭하기로 하였다.

그의 아들이며 선조의 형 하원군 이정에게는 작위 정1품에 가하고,

4대에게 작위를 내리고 덕흥대원군 묘를 봉사하게 하였다.

이후 잠저인 도정궁 후원에 가묘(덕흥궁)를 세워 신위는 백세토록 조천하지 않는 것으로 정하였다.

 

선조는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선조는 이후 생부의 묘를 덕릉이라 불렀는데,

사람을 시켜 남양주 근처에 나무하러 오는 나무꾼 중

덕묘나 덕흥 대원군묘라 하지 않고 덕릉(근처)에 다녀온다 라고 하는 나무꾼에게는

후한 돈을 주고 나무짐을 샀다 한다.

순회세자를 잃은 명종은 덕흥군의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기로 하고

한윤명,정지연 등을 사부로 선정하여 덕흥군의 세 아들의 교육을 맡게 하였다.

한때 윤원형은 그의 아들 들 중에서 후계자가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덕흥군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강권하여

덕흥군이 수락했지만,명종이 반대하여 결국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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