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산 안창호                 2019.09.19.목요일,맑음

도산 안창호(생졸; 1878.11.9-1938.3.10)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한말의 독립운동가·사상가며 독립

협회,신민회,흥사단 등에서 활발하게 독립 운동 활동을 하였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 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구세 학당에 들어가 그리스도 교도가 되었다.

1897년,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 공동회를 쾌재정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니이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 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 공학의 점진 학교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 사업을 벌였고,

1902년,앞으로 큰 일을 위해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 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 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생활 향상을

   위해 한인 공동협회를 만들어 '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1905년,을사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대한 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워 출판 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 산업 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설립하고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 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이등방문) 암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 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 정부가 내부 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 대표 회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 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 운동 기지를 마련

   하기 위하여 이상촌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홍구공원) 폭탄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 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미국 로스앤잴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으며

2012년1월,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루서킹 센터내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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