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조선일보 폐간         2019.11.02.토요일,맑음

1936년8월9일,손기정과 남승룡이 출전한 독일 베를린에서 제11회 올림픽이 열렸다.

손기정이 1위로 골인했다는 소식과 함께 825일자 동아일보에 월계관을 쓰고 수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감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 스포츠’를 뒤늦게 입수해 거기에 실린 사진을 복사하여 전재한 것이다

그런데 초판 때는 일장기가 선명하게 보였으나, 놀랍게도 재판에서는 원본과 달리 유니폼 가슴 부위의 일장기가 교묘히 삭제되어 있었다.


일장기 말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32년 김은배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6위 입상할 때도 눈에 거슬리는 가슴의 일장기를 말소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는 총독부의 트집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그 때와는 사뭇 분위기는 달랐다.

결국 이튿날 서울에 부임한 미나미 총독은 향후 6년간 저지를 조선 압살 정책의 첫 제물로 동아일보에 829일자로 무기 정간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관련된 인물들이 줄줄이 연행되었고,송진우 사장 등 많은 인물들이 강제로 사직하게 되었다.


193777일, 일제는 북경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국 침략과 동시에, 조선인을 대륙 침략에 동원했다.

황민화 운동,조선어 교육 폐지에 이어 1940년에는 창씨 개명까지 강행하면서 유례없는 민족 말살정책을 폈다.

1937년, ‘일반검열기준’을 만들어 총독부는 19396월, 다시 ‘편집에 관한 희망 및 주의사항’을 추가했다.

언론탄압의 검열 기준은 자의적으로 정할 수 있게 되었고 폐간도 어느 때나 가능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의 제4차 정간은 11개월 만에 풀렸지만 이후의 검열 강화 등 다양한 형태의 간섭으로 정상적인 신문제작이 불가능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19382월에는 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모든 신문은 ‘조선 춘추회’라는 어용 단체에 가입해야 했다.

 

19399월,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일제는 조선인의 황민화를 모토로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해 나갔고 결국 11월부터 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본의 자진 폐간을 종용하기 시작하였다.

자진 폐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940115일, 총독부는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불러 자진 폐간에 응한다면 총독부가 전 사원에게 1년치 봉급을 지급하고 윤전기 등 인쇄 시설을 사들이겠다고 제안했다.

 

두 신문이 말을 듣지 않자 총독부는 7월 들어 용지 통제권을 발동하여 신문 용지 배급량을 줄였고 신문사 간부들을 연행하여 폐간을 종용했다.

결국,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40년810일, 일제의 폐간령에 따라 폐간계를 낼 수밖에 없었다.

두 민족지의 폐간으로 조선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일문판 경성일보와 한글판 매일신보만이 남게 됐다.

20년 만에 다시 우리 신문 없는 언론 암흑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동아일보는 1940 811일, 최종호를 발행하고 12일 해산식을 가졌다.

사옥관리를 위한 법인인 ‘동본사(東本社)’를 1943 1월에 발족했다.

그리고 폐간 5 4개월 만인 1945 121일 복간되었다.


조선일보는 회사의 목적을 변경하여 의료사업을 경영하고 동방문화학원(육영재단법인)에 사옥을 기부하되

'조광', '여성','소년'은 계속 발행한다고 밝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