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2019.09.12.목요일,비

동학은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이다.

‘동학’이란 교조 최제우가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 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에는 손병희에 의하여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1860년 종교 체험 후,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많은 신도가 추종하기 시작했다.

창도 당시 동학은 내 몸에 천주(한울님)를 모시는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경천사상에 바탕한 나라 구제의 신앙이었다.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을 북접 주인으로 정하고 해월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최시형을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러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되고,

손병희는 더 나아가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을 동학의 종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의 사회사적 의의는 양반 사회의 해체기에 농민 대중의 종교가 된 점에 있다.

동학사상과 동학운동은 서민층의 반왕조적인 사회 개혁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최제우의 창도단계에서는 서민층에 널리 유포된 신앙 형태이었으나,

교조의 신원 운동을 통해 민중의 집단적 시위 운동으로 전환되면서 탐관오리의 혁파,외세 배척 등 정치적

요인이 끼어들어 사회 운동의 요인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1894년(고종31),갑오 동학 농민운동에 와서는 동학의 종교 운동이 쌓아 올린 만민 평등의 이념과 그 교문

조직이 기반이 되어 농민 운동의 집대성인 사회 개혁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동학군이 표어로 내세운 ‘제폭구민,축멸왜이,진멸권귀’는 이미 동학 운동이 혁명적인 사회 개혁 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말해 준다.


개항.개화기에 동학 운동은 단발령에 대한 지지 세력이 되어 개화 운동 편에 서서 개혁 운동을 일으켰고,

1905년 천도교 선포 이후에도 개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보성학교와 동덕학교 등 많은 학교 경영을

통하여 신교육 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천도교 운동은 신민회 운동과 더불어 널리 서민층에 뿌리를 내려,

3·1운동에 나타난 자주 독립의 민족주의 역량을 키운 민족 운동 세력으로 근대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1860년4월5일, 최제우는오랜 정신적 방황과 수행을 거쳐 마침내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득도하였다고 그의 경전 저술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때 그의 종교적 체험이 동학 창도의 기점이 되며,

1905년 손병희의 천도교 선포에 이르는 동학 운동의 교리와 조직의 원리를 제공한 것이다.

동학이 널리 영호남 서민층의 반왕조적 민심을 기반으로 하여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사회적 종교로 대두된 데는 조선왕조의 시운이 다하였다는 말세관과 사회 변동기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양반 사회의 신분 차별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이 커지고,적서의 차별을 괴로워 하였던 서민 계층에서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에 대하여 공명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제우 자신이 몰락 양반의 서출로 깊은 소외감을 가졌던 사실 또한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의 아버지 최옥은 한학자로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그의 문집 '근암집 '은 최제우에게 끼친 유교적 교양의 일단을 말해 주고 있다.

청소년기 최제우의 내면적 갈등은 문장 도덕이 높으면서도 벼슬을 못한 아버지에 대한 동정,가문을 위하여 입신양명을 할 수 없는 서출로서의 자기 처지, 비천한 신분의 생모에 대한 열등감이 원인이 되었다.

그는 40세까지 일정한 직업 없이 명산대찰을 찾아 구도의 방황을 계속했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시운이 쇠하여 개벽을 대망하는 말세였다.

이 시기의 가장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국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지진,역병 등이

가중되어 전국적인 농민 폭동의 민란의 시기에 접어든 데 있었다.

서양의 이양선의 출현과 서학의 전래도 왕조 질서의 동요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제우의 서교에 대한 이해가 동학 창도와 관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동학의 사상 내용에는 유,불,선 3교가 종합되어 있다고 하나, 그것을 통일하는 사상은 우리 민족의 경천

사상과 구제를 위한 민족적 염원이며, 민간 신앙적 요소가 널리 서민들에게 동학의 신봉자를 얻게 해주었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대부 양반 계층의 종교였던 유교의 사상 내용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무학의 서민들이 10여 년의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고 입도한 그 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서민에게도 군자의 인격을 갖출 수 있는 인격적 자존의 길을 열었다.


최제우는 천주나 천도가 서학의 독점일 수 없고 특히 동학이 서교와 다르다는 것을 뚜렷이 밝힐 필요를

느껴,서교와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서교에서는 빌어도 효험이 없고 조상 숭배 배격과 제사 부정을 공격하였다.

서교의 내세관을 비판하여 오직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것이 기이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서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비판은,

서양의 세력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위험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는 척사이다.

서양 문명과 서양 군함의 내습은 곧 천하 분란의 문명적 위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은 중화문 화권인 천하의 붕괴 속에서 내 나라를 단위로 한 ‘보국’의 종교이고,

안으로 ‘안민’의 새 사상이었다는 점에서, 민족 주의적 종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동학 교문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켰다고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여 금지시키고,

교조 최제우는 추종자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864년 봄, 대구 감영에서 혹세무민죄로 사형에 처하여졌다.

    
동학의 기본 사상은 최제우의 저술로 전해지는 두 가지 경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에 잘 나타나 있다.

'동경대전'은 한문으로 된 글로서 포덕문.논학문.수덕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용담유사'는 한글 가사체로 되어 있으며

   '용담가''안심가''교훈가''권학가''흥비가''도수가''몽중노소문답가''도덕가' 등이 있다.

   '용담유사'는 풍월을 노래한 가사가 아니고,자신의 사상을 도인들에게 전하려고 지은 일종의 사상 가사다.

    가사체의 문체도 훌륭하여 문학적인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용담가'는 자신의 가문과 신라 고도 경주의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였고,

'안심가'는 부인을 안심시키는 형식으로 일반 도중에게 수도를 계몽하고 있고,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보국의 신념을 역설했다.

'몽중노소문답가'는 꿈속에서 노소가 문답을 하는 우화체로,참위설과 풍수 지리설에 기초한 예언요의

  성격을 띠고 있다.조선왕조 400년이 시운을 다하여 쇠망하고 새 시대가 도래함을 노래하고 있다.

'권학가'는 민심이 날로 험악해지는 시운의 변천을 예감하면서, 도덕의 공부를 쌓아 천리를 따르고 천명을

  배울 것을 권하는 경천 신앙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원전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최시형이 암송

  하였던 것을 구송 대필하게 하여 오늘에 전한다는 설이 있다.

최시형이 피신하여 다니면서 포교하던 시절,

1880년5월, 강원도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만들어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다음해에 충청북도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으나,

현재 전하는 목판본은 1883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간행된 것과 경주판이 남아있다.


삼례집회(1892.11),보은 집회에서 교조 신원운동(1893.3),금구집회(1893.3)

최제우,최시형,손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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