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 사변             2019.10.31.목요일,맑음

1931년9월19일, 일본은 도발자 중화민국을 응징하겠다며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중국인들은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였고 전국 주요대 학에서는 ‘항일 구국회’가 결성되었다. 일본은 만주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만주 지역에 일본의 조종을 받는 괴뢰 국가 만주국을 성립했다.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30분 중화민국 동북변방군의 한 부대가 봉천 서북쪽 부근에서 우리일본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여세를 몰아 우리의 수비대를 습격했다. 적대행동을 개시한 것은 그들(중국)이며 스스로 화를 자초한 장본인이다. 원래 우리 남만주 철도는 지난해 조약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획득했고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다른 나라가 손댈 수 없다. 중화민국 동북군은 감히 이것을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본제국 군대에 발포까지 했다. 본관은 철도 보호의 중책을 지고 있는바, 그 권익을 지키고 제국 군대의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1931년 9월 19일, 일본은 이와 같은 공식입장을 밝히고, 도발자인 중화민국을 '응징'하겠다며 군대를 동원했다. 이른바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봉천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 두절되었다.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국제연맹에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의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은 유럽의 더 큰 문제들 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 영국은 일본을 감싸기까지 했다. 결국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정부의 주장에 가깝게 아래와 같은 결의를 하고 그 문제를 마무리해버렸다.

1. 만주에 대해 영토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일본의 성명을 중시한다.
2. 일본정부는 그 국민의 안전 및 재산보호가 확보되는 대로 군대의 철수를 가급적 빠르게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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