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호(廟號)의 뜻             2019.01.12.토요일,비
왕이 죽으면,신하들은 왕이 살아 생전 했던 일들을 바탕으로 별명을 붙여 준다.

이 별명을 ‘묘호(廟號)’라 한다.

신하들이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수 없다.
신하들은 평소에 임금을 ‘상감마마’,‘주상 전하’로 높여 부르나 죽으면 새 임금이 있어 그렇게 부를수 없다.

그러한 까닭으로 왕이 죽고 나면 별도로 이름을 붙여 줘야 했고,이 별명을 ‘묘호’라 한다.

‘廟(묘)’ 자가 ‘죽은 사람의 혼령을 모시는 장소’를 뜻하니, 묘호는 ‘죽은 임금에게 붙여 준 이름’ 이다.

세종.단종,세조,선조 ,정조 같은 이름이 전부 묘호다.

묘호가 없는 임금도 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묘호가 없이 '연산군'‘광해군’이라 부른다.

 

왕의 본부인인 왕비가 낳은 아들은 호칭이 ‘○○대군(大君)’이고,

첩인 후궁이 낳은 왕자의 호칭은 ‘○○군(君)’이다.

왕의 본부인인 왕비가 낳은 딸의 호칭은 '○○공주'이고

첩인 후궁이 낳은  딸의 호칭은 '○○옹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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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창대군(永昌大君)     2018.12.13.목요일.맑음

영창대군; 이 의(㼁)

생졸;1606(선조 39)∼1614(광해군 6).

가계도;

 부; 선조

 모; 인목왕후(김제남의 딸)


선조의 열네째 아들로 아들 중 유일한 정비 소생으로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정례(절차를 다 밟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의식)로 공빈 김씨의 소생 임해군과 광해군중 두째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 뒤 정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의 소북파는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선조는 죽으면서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를 내렸다.이로인해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이첨의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1613년 광해군 5년에 소양강을 무대로 서양갑,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다.이이첨 등은 이 역모 사건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도 관계한 것으로 진술을 유도하여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구원의 상소가 이어졌고,형제와 여덟 살밖에 안된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자,대북파의 요구로

1613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 부사 정항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되었다.

광해군 일기에 의하면 정항이 영창대군을 굶겨서 죽게 하였다거나 정항이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영창대군을 살해 했다고 되어 있으나,인조실록에 의하면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이정표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죽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그의 나이 경우 8살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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