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제5대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         작성일자; 2010.04.29.목요일,맑음

 

생졸; 1436-1473,38세 

 경혜공주는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제 6대 단종의 친누이이기도 하다.

참판 정충경의 아들 영양위 정 종에게 하가하였는데, 

남편 정종은 단종 폐위와 사육신 사건으로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며 공주의 병을 이유로 잠시 도읍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경혜공주 또한 가산이 적몰되고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으나,

순천부사가 관비의 노역을 시키려 하자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세조는 경혜 공주에게 집과 재산,노비를 하사하였으며,

예종에 이르러서는 경혜공주 내외의 아들을 종친의 예로 서용하였다.

 

경혜공주는 1473년 성종4년12월30일 죽었으며,

성종은 부의로 쌀,콩 아울러 70석,정포 50필,종이 1백권,석회 60석,촉랍 30근을  내려 주게 하였다.

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에 있다.

 

조선의 국왕 가운데 가장 가엾은 인물로 단종이 손꼽힌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숙부에게 왕위도 빼앗기고 결국 목숨마저 빼앗겼던 그의 짧은 인생은

실로 애잔하기 짝이 없다.

한데 그 시절 단종 못지않게 기구한 삶을 보내야 했던 여인이 있었다.

바로 단종의 친누나 경혜 공주였다.

 

경혜공주는 문종 현덕왕후 권씨의 맏딸이다.

1436년,세종 18년에 그녀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세자였지만,

어머니는 후궁인 종4품 승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정3품 현주에 봉해졌다.

그녀의 신분은 세자의 서녀로서 어머니보다 품계가 높았다.

그해에 세자빈 봉씨가 폐출되었고,

이듬해인 1437년,세종 19년 2월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됨에 따라

그녀는 동궁인 경복궁 자선당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7세 때인 1441년,

  세종 23년에 어머니가 남동생 홍위를 낳다가 산욕을 이기지 못하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정2품 평창 군주였던 그녀는 권씨 가문의 여종 어리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없어도 비교적 행복했다.

왕실에는 수많은 어른들이 있었고, 어린 왕자와 군주들의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수양대군,안평대군,금성대군 등 여러 숙부들의 눈길도 따스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5세 때부터 운명이 꼬이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도 세종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왕실에서는 그녀의 혼사를 서둘렀다.

자칫 국상이 선포되면 왕실이든 사가든 간에 3년 동안 혼인이 금지된다.

시기를 놓치면 그녀는 18세 이후에나 시집갈 수밖에 없다.

부마로 낙점된 인물이 전 한성부윤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이다.

 

정충경은 효령대군의 장인이었던 정역의 맏아들이며 세종의 여덟째 왕자인 영응대군의 장인이다.

해주 정씨는 조선 건국 이래 태종·세종·문종·단종·중종·인조까지 여섯 명의 임금과 사돈관계를 맺은 유서

깊은 가문이다.

 

평창군주와 정종은 1450년,세종 32년,1월24일 혼사를 치렀고,

그로부터 52일 만인 2월17일 세종이 승하했다.

그 해에는 1월과 2월 사이에 윤1월이 끼어 있었으므로 날짜가 그렇게 된 것이다.

실로 아슬아슬한 혼인 작전이었다.

 

국상 중이었던 2월 22일 아버지 문종이 보위에 오르자 어머니 권씨는 현덕왕후로 추존되었고

그녀는 자동적으로 공주가 되었다.

공주와 정종 부부가 정식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동거하기 시작한 때는 1년 뒤 소상이 끝난 1451년 봄이었다.

당시 문종은 경혜공주의 저택을 수리하게 했지만 오래 되고 기울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양덕방에 저택을

짓게 했다.

그런데 사헌부 지평 윤면이 농사철에 백성을 동원하고 민가를 철거해서는 안 된다며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그 무렵 여러 대군들의 저택이 매우 크고 화려해서 세간의 비난을 사고 있었다.

문종은 공주와 부마가 구설수에 오를까봐 걱정하여 윤면에게 헐리는 민가의 수효를 줄이고,

또 다른 폐단이 있는지 살피도록 명했다.

문종의 딸 사랑은 실로 지극했다.

1452년,문종 2년에 중추원 부사 조유례가 할머니의 허물 때문에 사직서를 내놓자 윤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2품의 관직에 제수했다.

경혜공주가 어린 시절 재액을 피하기 위해 그의 집에서 한 동안 살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불과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 마저 세상을 떴다.

그리하여 남동생 이홍위(단종)가 1452년5월18일 경복궁 근정문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그녀의 나이 18세 때였다.

본래 미성년인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성년에 이를 때까지 대왕대비나 대비가 섭정을 맡는 것이 정상이다.

한데 할머니 소헌왕후나 어머니 현덕왕후가 앞서 세상을 등졌으므로 왕실에는 섭정을 할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나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사칙 양씨 등에게는 애초에 섭정의 자격이 없었다.

할아버지 세종은 일찍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김종서와 황보인을 비롯해 집현전 출신 신료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단종을 보위하며 황표정사로 조정을 이끌었다.

황표정사란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국왕은 그 위에 형식적으로 다시 점을 찍음으로써 추인하는 방식이었다.

그로 인해 조정 신료들은 두 대신(황보인,김종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자들은 두 사람의 독주에 크게 반발했고,

성상문,신숙주,박팽년 등 집현전 출신 신료들도 의정부의 비정상적인 권한 확대에 우려를 표했다.

그런 상황에서 강경파인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조정에 드나들자,

김종서와 황보인은 온건파인 안평대군을 끌어들여 그를 견제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단종의 고명 사은사를 자처함으로써 경계심을 약화시킨 다음

1453년,단종1년10월10일 밤 권남,함녕회,홍윤성,양정 등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켰다.

계유정난이라 불리는 쿠데타였다.

 

그날 단종은 마침 누나 경혜 공주를 만나러 영양위궁으로 출타하여 궁에 없었다.

수양대군은 무장 유숙,양정,이을운 등을 데리고 북촌에 있는 김종서를 찾아가 일가를 피바다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어서 곧장 궁궐에 들어가 황보인을 비롯해 수많은 대신들을 척살했다.

거사의 성공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정인지를 좌의정,한확을 우의정에 앉히고 자신의 심복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이어서 그는 동생 안평대군을 붕당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로 유배한 뒤 사사했고,

이징옥의 난 까지 진압한 뒤 왕위를 이어받기 위한 왕실 회유에 나섰다.

 

1453년 단종 1년,12월26일에 수양대군은 압수한 황보인과 김종서,정분,허후 등의 땅을 난신전으로 삼아 공신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왕실을 회유하기 위해 혜빈 양씨와 경혜공주,경숙옹주,봉보부인 이씨와 궁녀,내시들에게 직분에 따라

고루 나누어주었다.

그 때문에 어린 임금의 처지가 몹시 옹색해졌다.

정난 세력은 왕실을 우군으로 삼기 위해 이후에도 계속 선물 공세를 펼쳤다.

1454년,단종 2년 8월5일 수양대군은 정효전이 음모를 고했다는 이유로 영양위 정종,영천위 윤사로,판내시 부사 이귀,

상궁 박씨에게도 노비와 전답을 주었다.

이듬해인 단종3년 1455년에는 지방의 정적들로부터 빼앗은 노비를 혜빈 양씨,신빈·숙빈·숙의·정의공주,경혜공주,

경숙옹주,봉보부인과 상궁 박씨,판내시부사 윤기,행 내시부 좌승직 복회에게 노비 등을 주었다.

1461년(세조 7년) 7월,영양위 정종은 광주에서 승려 성탄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에 압송되었다.

이때 그는 혹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야말로 충신이라고 소리쳤다.

이에 분노한 세조는 10월 20일 정종을 능지 처참하고 아내 경혜공주를 순천부의 관노로 삼았다.

왕족은 대역 죄인이라도 고문하지 않고 노비로 삼지 않는다는 국법은 안중에도 없었다.

광주에 있다가 졸지에 노비 신세가 된 경혜공주는 피눈물을 훔치며 3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부로 향했다.

어린 자식을 그곳에 홀로 남겨둘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순천부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사면을 받고 천역에서 벗어났다.

정희왕후 윤씨가 강경하게 남편 세조를 닦달했기 때문이었다.

이 극적인 상황 뒤에는 어린 시절 공주의 유모였던 어리니가 있었다.

그 무렵 자산군의 유모였던 어리니는 세조의 며느리 수빈 한씨를 통해 정희왕후에게 공주의 선처를

부탁 했던 것이다.

그 녀가 돌보던 자산군은 훗날의 성종이다.

만삭의 몸으로 서울에 올라온 공주는 얼마 후 딸을 낳았다.

젖이 떨어질 무렵 공주는 정희왕후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절에 들어가 남편 정종의 극락 왕생을 빌었다.

세월이 지나자 예전의 따뜻한 숙부로 되돌아간 세조는 그녀를 극진하게 보살폈다.

1462(세조 8년) 2월14일, 세조는 한성부에 명하여 충익사를 경혜공주의 거처로 내주었다.

그 해에는 형조에 명하여 공노비를 내렸고 가을부터 생활에 필요한 녹봉을 지급하게 했고,

이듬해에는 하성위 정현조에게 그녀가 편히 살만한 집을 구하게 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467년(세조 13년) 7월 8일에는 전지를 지급하기도 했다.

세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은 1469년(예종 1년) 4월 10일 경혜공주에게 황금 2정과 백금 6정을 돌려주었다.

과거 세조가 그녀의 재산과 노비를 모두 돌려 주었지만 보물만은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틀 뒤 예종은 신료들에게 선왕의 유훈이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역적의 후예가 아니라 종친으로

대접하도록 했다.

예종으로부터 보위를 물려받은 성종 역시 경혜공주를 각별하게 모셨다.

그는 어린 시절 유모 어리니로부터 그녀의 고통스런 역사를 들어 알고 있었고 아들 정미수와는 한집에서 살기까지 했다.

경혜공주는 1473년(성종 4년) 12월30일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고양의 대자골에 마련되었다.

 

문신 이승소는 '경혜 공주 묘지'에 이렇게 썼다.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서울에 올라온 뒤 정희왕후 윤씨의 배려로 어린 성종과 함께 사가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공주의 자식이기에 앞서 대역 죄인의 아들이었으므로 늘 조심스럽게 살았다.

세조의 유훈이 없었다면 평생 노비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 경혜공주의 고난에 찬 세월을 목도했던 그는 지극한 효성을 바쳤다.

공주가 병석에 누웠을 때 달인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간호하면서 옷 띠를 풀지 않았다.

심지어 배변을 맛보아 용태를 살피기도 했다.

 

1476년(성종 7년), 정미수는 소꿉 동무인 성종의 배려로 문과에 합격한 뒤 돈령부 직장,형조 정랑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서거정,신숙주 등의 공신들이 그를 죄인의 자식이라 하여 수시로 탄핵했지만 성종의 비호로 현직에 머물 수 있었다.

정미수는 성종에게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양자가 되기를 허락받은 뒤 그녀를 친자식처럼 받들어 모셨다.

이에 화답하여 정순왕후는 말년에 자신의 전 재산과 노비를 그의 아들 해림군 정승휴에게 물려주었다.

 

성종은 1476년과 1477년 두 차례에 걸쳐 유복자로 태어난 그의 여동생 정씨의 혼인 예물을 내려주었다.

또 1487년(성종 17년)에는 경혜공주를 끝까지 모셨던 사노비 강선을 면천시켜 첨지로 삼았다.

사헌부 장령 정지가 개국 이래 천례에게 양반 관직을 제수한 전례가 없다며 반대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 정미수는 선전관.승지.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공조판서를 역임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찬 겸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506년 ,우찬성 재임 시절 중종 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해평 부원군에 제수됨으로써 가문의 오점으로 남아있던

아버지 정종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데 성공했다.

 

□ 문종의 딸 경혜 공주와 야사      

조선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맏딸이자, 단종의 누이이다.

세조 때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운동의 돌풍 속에서 남편 정종과 함께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가,

1461년 순천부의 관노가 되기도 했다.

1436년(세종18년)에 태어나  1473년(성종 4년) 세상을 떠났다.

1461년(세조 7년) 10월 22일,

  순천 부사 여사신은 아침나절 관아 앞마당에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우두커니 북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여종을 보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다른 노비들이 마당을 쓸고 대청마루를 닦느라 부산한 시간이었다.

  한데 여종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아이와 함께 대청에 오르더니 여사신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 나라 조선의 공주다.

  난데없이 흉사를 당해 이 꼴이 되었지만 너는 선왕의 신하로써 어찌 내게 이토록 무엄한가?”

  그 말을 들은 여사신은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는 바로 문종의 딸이며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였다.

  그녀는 몇 해 전 남편 영양위 정종이 귀양살이 하던 광주에서 아들을 낳았고 ,

  새로이 생명을 잉태한 상태에서 세조의 명을 받은 전라도 관찰사 함우치의 조치에 따라 순천부의 노비가 되었던 것이다.

  비로소 경혜공주를 알아본 여사신은 정중하게 예를 표한 다음 그녀에게 노비처럼 일하는 흉내라도 내달라고 간청했다.

  광주 목사 유곡이 부마인 영양위 정종의 감시를 소홀히 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고 가솔이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공주 때문에 자신도 그런 모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방에 세조의 눈과 귀가 있던 시절이었다.

  여사신의 말을 들은 경혜공주는 사내 아이를 한쪽으로 물러서게 한 뒤 걸레를 집어 들었다.

  남편 정종이 역모 혐의로 능지처사 당한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녀가 구차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 것은

  아들 정미수와 태중에 숨 쉬고 있는 생명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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