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천             2019.12.24.화요일,맑음

박순천(생졸; 1898년-1983년)은

아버지 박재형과 어머니 김춘열의 사이의 무남독녀로써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2·4·5·6·7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여성 정치가로써 야당지도자로 활약했다.


10세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7년, 부산 진일신여학교를 졸업,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과 연결되어 마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1주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도피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때 ‘순천댁’이라는 별칭을 사용하였고 그 후로 ‘박순천’으로 세인의 입에 굳어졌다.

   그 해 가을 기녀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동경 요시오카 여자의학 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달 못 다니고 3·1운동 때의

   보안법 위반혐의로 다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마산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일본에 유학하여

1926년,니혼 여자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28세에 동경 유학생이던 변희용과 결혼하였다.

   경상북도 고령 촌가에 살며 농촌 계몽운동에 전념하다가,

1939년,서울에 올라와 조선 공예주식회사 금강 전구공장 여공감으로 있기도 하였다.

1937년,황신덕과 경성 가정여숙을 세워 부교장으로 일했는데,  학교가 오늘날의 중앙여자

   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1945년,8·15 광복 직후 건국 부녀동명을 조직,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불복하는 신탁

   통치 반대에 앞장 섰으며,

1947년부터는 독립촉성 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8년,'부인 신문'을 창간, 사장으로 5년 동안 활약하였다.

   정부수립 후에는 감찰위원이 되고,

1949년,국민회 중앙총본부 부위원장과 대한여자 청년단 단장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대한부인회 총본부 회장에 부임해서는 6년간을 재직하였다.

1950년,대한 부인회 소속으로 서울 종로 갑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제2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55년,자유당 정권과 투쟁하면서 민주당 창당에 참여,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거쳐,

1956년,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이래 네 차례나 연임하였다.

1958년 제4대,1960년 제5대,1963년 제6대 국회의원으로 거듭 당선되어 여권신장과 민권

   수호에 앞장섰으며,제3공화국 때는 민주당 총재를 역임하였고,

1965년,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당수가 되었으나,한일회담 비준반대를 위한 의원직총사퇴의

   극한투쟁결정에서 강경파인 윤보선이 탈당하자,제5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유진오에게

   당수직을 물려주었다.

1967년,다시 통합 야당이 된 신민당의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5선 의원을 기록하였다.

   고령으로 정계를 은퇴한 뒤

1972년,경기도 안양근명 여자상업학교 이사장으로 국토통일원원원 고문,육영수 여사 추모

   기념사업회 이사장,국정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3년3월경,일제 강점기인 경성의숙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정신대로 나갈 것을 종용한 것

   등의 친일 행적이 최근에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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