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지청천            2019.11.02.토요일,맑음

1920년 대 초반, 항일 무장 투쟁을 선언한 독립군들은 홍범도와 김좌진 등의 활약으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독립군에게 패한 뒤 더욱 집요해진 일본군의 보복과 1921년에 일어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독립 투사들은 다시 심기일전해 새로운 독립 운동단체를 조직해서 항일 무장 투쟁의 맥을 이어갔다.


지청천은 자유시 참변 이후 여러 독립 운동 단체들을 결성하고 이끌었던 대표적인 항일 무장 투쟁 지도자

중에 한 명이었다.

지청천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였으나 3·1운동 이후 귀국해 독립 운동에 뛰어든 열혈 청년이었다.


그는 1888년에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지석규 혹은 지대형으로 알려져 있는데, 독립 운동을 시작하면서 지청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명 이청천이라고도 한다.


그의 집안은 조선에서 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지청천은 19세가 되던 1907년에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미 일제가 조선 군부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뒤여서 군인 양성소인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1909년에 폐교 조치가 내려지면서 지청천을 비롯한 40여 명의 육군 무관학교 학생들은 일본의 동경

육군 중앙 유년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다 1910년에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청천은 한동안 일본 장교로 복무하며 실전 감각을 익혔다.

그러다가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탈영해 만주로 망명했다.

지청천은 독립군 중에서 유일하게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엘리트 출신으로, 실제로 독립군 양성과 지휘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만주로 망명한 지청천은 신흥 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의 첫 발을 내딛었다.

신흥 무관학교는 1911년에 이시영,이회영 형제가 남만주에 설립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학교다.

그런데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독립군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1920년에 폐교하게 되었다.

지청천은 신흥 무관학교에서 양성한 군사들을 이끌고 서로군정서에 편입한 후

1921년1월에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지청천은 대한 독립군단의 군사 고문으로 있다가 그해 5월 자유시로 이동했다.

1921년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대한 독립군단에 소속되었던 많은 독립군 부대가 피해를 입었다.

이때 지청천은 홍범도와 마찬가지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레닌 적군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덕분에 지청천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르쿠츠크로 넘어간 이후에 소련 공산당과 갈등이 생겨 체포되었다.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1922년에 만주로 돌아왔다.

탈출했다는 말도 있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구명 운동 덕분에 풀려났다는 말도 있다.


만주로 온 지청천은 다시 여러 항일 독립 운동단체를 결성해 이끌어갔다.

그는 1924년에 양기탁,오동진 등과 함께 정의부를 결성하고 군사 위원장 및 사령관을 맡았다.

정의부는 임시 정부의 형태를 띤 독립 운동단체로 항일 무장 투쟁과 함께 만주 지역 한인 거주민에 대한

교육 및 경제 자활 사업을 실시했다.

정의부는 신민부,참의부와 더불어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단체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 세 단체는 1928년에 통합을 시도했다.

지청천은 혁신의회의 군사위원으로서 세 단체의 통합에 앞장섰다.

그러나 단체들 간의 주도권 경쟁으로 통합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의부도 해체되었다.


그러자 지청천은 1930년에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정당인 한국 독립당 창당에 참여했다. 한국 독립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구성하는 주요 세력이었다.

이때부터 여러 독립 단체들은 정당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주로 북만주에서 활동을 했던 지청천도 이러한 정당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무장 독립 투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을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장 투쟁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무장 투쟁을 펼쳤다.


특히 1931년에 일어난 만주 사변을 계기로 항일 무장 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만주 사변은 일본이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력 도발한 사건이었다.

지청천은 한국 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자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1933년에는 대전자 전투에 참가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중국 측과 연합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1930년대에 들어 우리 독립군이 거둔 가장 큰 전과였다.


이후 지청천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중국 본토로 이동했다.

그리고 1935년에 한국 독립당에 내분이 생기자 탈당해 김원봉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족 혁명당에 참여했다. 민족 혁명당은 임시 정부를 견제하는 야당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김원봉이 좌익 경력자들을 포용하는 유화책을 펼치자 지청천은 이에 반발해 갈등하다가 탈당했다. 지청천은 1937년에 다시 김구 세력에 합류해 임시 정부의 군사 부문을 책임지게 되었다.

    

1919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의 강제점령에 대항해 3권 분립의 민주공화정부를 표방하며 각종 광복 정책을 수립, 시행했다. 그런데 1920년대 초 임시정부가 자리를 잡지 못하자 계파 간에 분열이 일어나 위기에 봉착하였다. 임시정부 참여자들은 갈등을 조정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보고자 국민대표회의를 결성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논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에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면서 다시 한 번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김구는 비밀 결사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일본 요인 암살 등 임시정부의 특수공 작 임무를 맡겼다. 그 결과 1932년에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등의 의열투쟁을 성사시켰다. 이 일로 중국과 연합을 구축하는 등 임시정부의 무장 투쟁이 가시적 성과를 이룩하기 시작했다.


지청천은 김구와 함께 한국 독립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탈당하기도 했으나 결국 다시 김구에게 협력해 임시정부의 군사 부문을 이끌어 갔다.


한편 1937년에 발생한 중일 전쟁으로 자극을 받은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자적인

군대의 창설을 준비했다.

그 결과 1940년 9월에 충칭에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한국광복군은 10개 처,2개 대의 총사령부와 3개의 지대로 조직되었다.

지청천은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광복군은 모병과 선전 활동을 하면서 항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광복군이 창설되고 1년이 넘도록 광복군을 독자적인 군으로 승인하지 않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애초에 광복군은 중국 정부의 승인과 원조를 받아야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광복군을 중국군의 지원군 형태로 남겨두려고 했다.

결국 임시 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중국 정부로부터 광복군의 승인을 받았다.


1941년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등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내세운 행동 준승 준수 조건 때문에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완전한 자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44년 8월, 행동 준승의 폐기를 약속받았다.


이때부터 지청천은 광복군을 직접 사열하며 항일전을 준비했다.

1945년8월에는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을 편성해 국내 진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8월 15일 히로시마 원폭으로 전쟁 의지를 잃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광복을 맞이하였다.

일본과의 결전으로 조국의 독립을 직접 쟁취하려던 광복군은 끝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조국이 독립하자 광복군은 해체되었다.

지청천은 1947년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광복군을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연합군이 광복군을 교전 단체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지청천은 귀국 후 이승만 정권과 손잡고 대동청년단이라는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선 정치인으로서 그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그는 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한중협회 회장 등을 거쳐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재선의원이 되었으며,

1951년에는 제2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국회 전원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대한 군인 유가족 회장, 반공 통일연맹 최고위원 등을 거치면서 반공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57년에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