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파와 시파               2019.08.03.토요일,맑음

시파,벽파 분립에 관한 문헌상으로는 세 가지가 분류된다.

첫째, 분파의 기미가 정조4년(1780년)부터 있다가 정조12년(1788년)에 정민시의 상소를 통해 처음으로

        시파.벽파의 호칭이 나타났다는 설

둘째, 영조 만년에 척신 사이에 남당과 북당의 갈림이 있었는데,

        정조대인 1795년 이후로 남당에 가까웠던 자들이 벽파,북당에 가까웠던 자들이 시파로 분립했다는 설

셋째, 기원은 남당과 북당에 있으나,정조 8년(1784년)부터 시파,벽파의 호칭이 쓰이기 시작했다는 설

   이들에 따르면 시파.벽파 분립의 표면화는 정조의 탕평정책이 성숙되어 가는 시기인 정조 12년-19년

   사이인 것이 분명하다.그리고 영조대의 남당,북당과의 연계는 반드시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노론 우위에 대한 입장 문제가 두 분파에 공통되어 이러한 연계 제시가 있었던 것이다.

   시파,벽파가 표면화된 뒤 사색은 명색만 남고 정국은 이 두 파로 재편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분립은

   공공연해졌다.특히 시파의 부각에 위기를 느낀 벽파의 결집,공세가 두드러지는 경향이었다.


1. 시파(時派)조선 후기 정조가 준론 탕평 정책(강경론을 앞세운 탕평정책)을 통해 기존의 노론 우위의

    정국에 변화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을 때 지지를 표명한 정파이다.

    영조대에 취해진 탕평책은 붕당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없애고자 타협을 종용하는 것을 특징이다.

    당시 대립하던 노론,소론 중에 온건론자들이 이를 지지,그 정국이 완론탕평이다.

    그 완론탕평을 탕평당이라 불리기까지 하였다.

    영조대의 완론탕평은 이처럼 붕당간의 병진(같이 앞으로 나아감)을 기본 방침으로 하였다.

    그러나 기반 확보 과정에서 노론의 우위를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탕평정책은 노·소론간에 청류를 자처하는 부류의 반대에 부딪혔다.

    영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혼인 관계로서

    특히,온건한 노론계 대신들과 유대를 맺어 지지 세력으로 삼게 되었다.

    완론탕평으로 붕당간의 격심한 대립은 일단 수습되었으나 혼인 관계를 수단으로 지지 세력을 확보한

    나머지 정국 운영에 척신의 비중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탕평당계 척신들은 영조대 중반에 와서 일세를 이루어 남당(南黨)이라 불리면서

    청류 세력의 동당(東黨)과 대립하였다.

    또한,청류적 정치관을 가진 사도세자와의 반목도 심하였다.

    세자인 사도세자가 사사된 뒤에 영조가 후회하면서 세손(훗날의 정조)의 보호를 부탁한 것도 척신인

    홍봉한 등으로,이들도 북당(北黨)이란 일세로 남당과 대립하였다.

    북당은 세손 보호의 임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한편으로는 남당으로부터 노론의 우위를 방기(내버려둠)

    하고 시세에 편승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도 사대부의 의리와 명절을 중요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하였다.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삼는 기존의 척신당의 틈바구니에서 체제 확립의 한계를 직시하였다.

    이로써 그간 양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정계의 중심부로 대폭 끌어들여,이른바 준론탕평 또는

    청류탕평을 펴게 되었다.

    청류는 영조 말에 동당 또는 청명당을 이루어 척신당을 비판하던 노론계 인사(김종수,김치인·이명식·

    유언조·尹蓍東·남유용·서유린·송인명·정존謙 등)가 주축이었다.

    그러나 다른 당색도 배제하지 않은체 정조 스스로 규장각 및 초계문신제도를 통해 비노론계의 진출을

    활성화 시켜 갔다.

    1788년(정조12년)에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 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노론과 남인의 보합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되다시피 한 임오의리 문제를  

    제기하여 노론을 크게 당혹시키는 형세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노론 내부의 시파,벽파의 분열은 이러한 형세 변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즉,청류 가운데서도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부류가 다시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시파로

    지칭되었다.

    정조가 죽은 뒤,어린 군주 순조가 즉위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에 김용주,김관주,김일주 등 계비의 형제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해 반정조적 입장에서 벽파와 결탁,

    시파에 대한 탄압이 가해졌다.

    1803년(순조3년)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면서 시파의 경주 김씨 가문과 벽파에 대한 반격이 가해

    졌다.

    순조대 이후의 시파,벽파 대립은 서로 다른 정파를 보합시키려는 국왕의 입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전개되었으므로 대립이 극단화하고 감정화되는 양상을 현저하게 보였다.


2. 벽파(僻派)는 정조 즉위 후 외척을 배제하고 노론,소론 및 남인의 청류를 등용한 후 1792년 남인들이

    사도세자 문제를 재론하였다.

    집권 노론 층은 기왕의 입장을 확인하면서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관철시키고자 했는데 이를 벽파라 한다.
    벽파와는 반대로 왕의 정책을 지지하던 일부 노론세력을 시파로 부른다.
    벽파는 정조대에는 불리하였으나,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804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시파의 반격으로 다수의 벽파가 축출되었고

    1807년 완전히 패배하여 시파가 실권을 잡았다.

    영조는 붕당간의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완론탕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지지하는 노론계 대신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정순왕후(영조의 계비 김씨)의 형제인 김귀주를 중심으로 결집한 이들은 남당으로 불린 척신당을 형성

    했다. 한편 죽은 사도세자의 장인으로서 세손(훗날 정조)의 보필을 맡게 된 홍봉한 일파는 북당으로,

    남당과 대립하며 또다른 척신당을 이루었다.

    당시의 양당은 1762년(영조38년)의 사도세자 사건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가 정치관에 있어 영조와는 차이가 있었으며 집권 노론 척신당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던 만큼 대부분의 노론은 국왕으로서의 자질에 큰 하자가 있는 사도세자를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었으므로 당시 노론 대신의 처신도 큰 잘못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한 반면 일부 비판적인 노론 및 소론과 남인은 사도세자가 개인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죽일 만한 죄는 되지 않았는데 정국의 전권을 장악했던 노론의 집권 주류가 모함하여 죽게 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정파의 분립으로 구체화된 것은 정조대에 이르러서였다.

    정조는 즉위 후 왕권확립을 위해 의리와 명절을 강조하는 준론 세력을 중심으로 탕평을 실시하여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노론,소론 및 남인의 청류(淸流)를 등용했다.

    아울러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를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이들을 자신의 친위학자군으로 삼았다.

    1788년(정조12년)에는 남인 채제공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비노론계가 중앙 정계에 많이 진출하게 되고,

    1792년(정조16년)에는 영남 남인들이 사도세자사건의 명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론 집권층은 왕권 강화 정책에 의해 입지가 축소되고 있었는데다가 사도세자 문제가 재론됨으로

    정치적 정통성 마저 위협 받게 되었다.

    그러자 강경파를 중심으로 사도 세자 사건과 관련된 기왕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확실히 관철시키고자 했는데,이들이 벽파를 형성했다.

    벽파의 주류는 역시 노론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심환지였다.

    그는 신임의리의 고수를 표방하고 이에 위배되는

    남인 계열의 채제공,이가환,이승훈과 소론계의 서명선을 성토에 앞장서 공격하여 벽파의 선봉으로 인정

    되었고 이후 영수가 되었다.

    이러한 벽파와는 반대로 우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는 타 당파의 정계 진출도 무방하다는 생각에서 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일부의 노론세력이 있었는데,이들은 노론의 우위를 방기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고
    하여 벽파에 의해 시파로 불렸다.

    벽파는 정조대의 정국 구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고 자파의 김관주 등을 조정에 진출시키는 한편,

    벽파의 정국 운영에 장애가 되는 시파 세력을 비롯한 노론계 인물들을 의리에 배치되고 사도세자 추숭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대거 정계에서 축출했다.

    또한,1801년에 시작된 천주교 탄압을 이용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했으며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적

    구도의 핵심이며 시파 세력인 김조순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장용영을 혁파했다.

    그러나 1804년(순조4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벽파와 경주 김씨 세력은

    김조순이 주도하는 시파의 반격을 받았다.

    김달순이 사사당하고 김관주가 유배되는 등 다수의 벽파가 축출되었으며,

    마침내 1807년,이경신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완전히 패배하고 김조순의 안동 김씨가 실권을 잡았다.

    이로부터 왕권이 유약해지면서 왕권 문제를 초점으로 하여 발생한 정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파,벽파의

    분파는 끝나고,이후 정국은 극소수의 노론 중 이름있는 외척 가문 중심으로 전권이 장악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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