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인박해(병인사옥)                2019.08.15.수요일,흐림

병인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전개된 집권자인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첫번째는 1866년(고종 3)  봄에,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세번째는 1868년,네번째는 1871년

으로 이어져 8,000여 명의 사상사를 속축한 대학살 사건이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1831년(순조31년),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교구로 설정하자 프랑스 선교회는 앙베르,모방,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농민,아녀자,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전파해 갔으나,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1839년(헌종5),천주교 박해 중 하나인 기해박해를 일으켜 3명의 프랑스 신부를 처형

했다. 이러한 탄압과 금압령에도 천주교는 확장되었으므로 조선은 서유럽인의 침략 위협이 고조됨에 따라 국가적 위기 의식이 높아져갔다.이러한 가운데 집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대응해 나갔다.


흥선 대원군은 1864(고종 원년), 연해주 지방을 차지한 제정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문호 개방 압력을

물리치는 데 프랑스를 이용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묵인하려고 한 때도 있었으나, 급속히 변하던 국내외

정세로 말미암아 실현시키지 못했다.


조선에서는 1860년(철종11년),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은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고 이양선이 자주 출몰함에 따라 쇄국

양이정책의 여론이 비등해져갔다.

문호개 방을 반대하던 조선 지배층은 '금수의 사상'으로 취급하던 천주교를 탄압의 1차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에 대원군은 1866년 1월초 국내에 있던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황해도·충청도의 연해를 중심으로 사교도가 왕래하는 뱃길과 선박 등을 감시하고,

조선인으로서 외국과 연락하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먼저 처형한 뒤 보고하라는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당시 국내에 있던 주교 등 9명이 체포되고,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붙잡혔다. 대원군은 9명의 프랑스 신부에게 개종하든가 나라 밖으로 떠나든가 하나를 택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들은 대원군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여 처형당했다.

결국 1866년에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가 서울과 그밖의 지역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프랑스 신부 가운데 체포 당하지 않고 황해도에 숨어 있던 리델이 그해 7월에 청나라의 톈진(천진)으로 도망가서 프랑스의 극동 함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보복을 요청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결국 이때의 천주교 탄압은 19세기 이래 서유럽 열강의 침략으로 위기 의식을 느꼈던 조선 정부가 취한

쇄국정책의 일환이었으며,종교를 앞세워 식민지 개척을 획책하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정책에 따른 파생물이기도 했다.이는 나중에 병인양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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