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9월 총파업               2019.11.15.일요일,맑음

1946년9월24일,

부산 지역의 노동자들이 노동 환경 개선과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벌인 총파업이다.


1946년1월부터 6월까지,

정국 혼란과 민생 위기 속에 천정부지로 오르는 물가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으로 시달리고 있던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동방 조선 화물자동차,화순 탄광,광주 양림 등 전국적으로 80여 회에 이르렀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 미군정에 대한 불신과 항의이며,

해방 후 과거의 식민지 관료나 친일파들이 미군정을 등에 업고 다시 나타나 국민들을 억압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원한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46년9월24일 부산에서 발생한 ‘9월 총파업’이었다.


1946년9월1일,

서울 철도 공장 종업원들이 일급제 실시에 반대하면서 휴업에 들어갔다.

1946년9월13일,

조선 철도 노동조합은 식량 배급,처우 개선,임금 인상 등의 요구 조건을 미군정청 운수부에 제출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부산에서도 철도 노동자들이 같은 요구를 제출하였으나 미군정 당국은 묵묵부답이었다. 

1946년9월19일,

부산 철도 공장 8,000명은 요구 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공장 작업에 큰 지장이 발생 할 것이라고 통고하였으나 미군정청은 만족할만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이에 ‘남조선 철도 종업원 대우개선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산하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지시하였다.

1946년9월23일 자정,

부산 철도국 노동자들은 미군정의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도 공장 초량

기관부 주도로 부산역,부산진역 등 12개 직장에서 일급제 폐지,임금 인상,급식제 부활,식량 배급 등의 조건을 내세워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철도 교통은 마비되었다.

1946년9월24일,

총파업이 발생하자 제7관구 경찰청(경남지방경찰청) 부산 경찰서는 투쟁위원과 파업 관계자 5명을 검거하는 등 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재빠르게 대응하였으나,

각계의 노동자가 총궐기하여 파업의 기세가 부산 노동계 전반으로 확산 되어갔다.

1946년9월25일,

조선 중공업 노동조합이 쌀 배급과 가족 수당 지급,해고 반대,언론과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1946년9월26일,

부산 체신청 종업원 1만1000명과 부산 전신전화건설국 기술자 종업원 300여 명도 총파업에 동참하였다.

1946년9월27일,

부산 해원동맹 산하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태업 시위에 들어갔고,

1946년9월28일,

남선 전기주식회사 운수부 400여 명의 파업,

1946년9월28일,

부산 철도 파업단은 경찰의 부당 간섭 반대,구속자 즉각 석방,파업 중 급료 지불 등을 요구

하면서 전체의 교섭권을 '조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에 일임하였다.

미군정 당국의 대대적인 노조 간부들에 대한 검거에도 불구하고 9월의 총파업은 전국적으로

10월(10월 항쟁)까지 이어졌다.

1946년10월1일,

부산 시내 12개의 중학교가 동맹 휴업을,부산 전화건설국 직원 150여 명도 파업에 들어갔다

1946년10월3일,

부산 해원동맹 산하 1만여 명이 파업에 동참하여 800여 척의 선박 운행이 정지되었다.

1946년10월7일,

학생 2,400여 명이 동맹 휴교를 하자 부산시경은 서울의 ‘파업 위원회’에서 내려온 7명을

검거하고 동시에 부산의 철도 파업 주동자들을 검거하였고,

부산 해원동맹 노동자들은 부산항 내의 기선과 기범선 100여 척으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전차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위협 시위를 하였다.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경찰과 군중 24명이 사망하였고 부산 시장이 습격 당하였다.

군정 당국에서는 소총 31정과 탄약 645발을 탈취 당했다고 언명하였다.

절영도에 있는 가솔린 창고와 중유 정제소는 국방 경비대 장교와 경찰이 경비에 들어갔고

미군 전술 부대가 투입되었다.

1946년10월8일,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으로 부산 철도는 노동자들이 복귀하면서 정상화 되어갔다.

1946년10월12일,

부산 철도 파업은 타결되었으나,부산 해원동맹 노동자들은 부산 해원 회관에서 농성하고

투쟁을 계속하자,

1946년10월17일,

미군정 당국은 부산해원동맹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므로 파업 중지를 결정하였다.

이후 각 부문의 노동조합 파업은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서울 등에서의 노동조합의 파업이 퇴조기에 접어든 뒤에도 영남 일대는 항쟁이 늦게까지

재연되었다.점차 전라도와 충청도,제주 지역까지 파급되어 많은 경찰서,지서가 파괴되고

인명 피해가 있었다.

10월 하순에는 화순 탄광 등 전라남도 각지에서,

11월에는 강원도 산골에까지 소요와 폭동이 일어났다.

10월 중순 이후부터 잠잠해지던 영남 지역의 항쟁 역시 재개되어 11월경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저항과 항쟁은 많은 인명 살상과 노동 조직의 파괴로 이어져 노동 운동과 대중 운동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이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탄압으로 노조 간부 및 조합원들이 대거 피살되고 구속됨으로써 노동자 조직은 전반적으로 약화되었다.

부산·경상남도 지역의 '10월 항쟁'은

대구·경상북도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산적·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미군정이 노동 조직과 좌파 정치 사회 조직에 대해 강력하게 탄압함으로써 그 핵심 역량이 상당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9월과 10월의 파업을 거치면서 미군정의 비호를 받아 우익 세력이 부상되고 좌우익의 대립이 전면화되었다.

대중들은 생활난의 해결과 민주적 권리는 민주 정부의 수립 이전에는 얻을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대중 운동을 전개하고 투쟁 강도를 높여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1947년3월22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제2차 총파업 투쟁으로 이어졌다.

부산에서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계' 부산지구 철도 노조원의 총파업을 필두로

'부산조선방직주식회사',조선중공업,해원,체신 등의 각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1946년 9월 총파업이 민중 생존권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1947년3월의 투쟁은 민주적 제 권리를 강하게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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