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세자          2019.07.21.일요일,비

사도세자; 이 선(愃).

생졸; 1735-1762년

본관; 전주(全州)

호; 의재(允寬)

가계도

영조

  영빈 이씨(映嬪李氏)

    사도세자

       경의왕후(혜경궁) 홍씨; 영의정 홍봉한의 딸

          의소세손

          정조(이산)

          청연군주

          청선군주 

       숙빈 임씨;

           은언군(이언)

           은신군(이진);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입적하여 흥선대원군으로 하여

                              제26대 고종이 탄생한다.고종은 은신군의 증손자다. 

       명빈 박씨

           은전군;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선희궁 영빈 이씨며 영조에게 친자식에게 대처분을 내리자고 말한 여인이다.

한양굿이나 경기도 당굿에서는 지금도 사도세자를 별상이라며 모신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이 신의 지위로까지 격상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도세자는 살인자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살인 방식은 매우 끔찍하다. 내관 김한채를 죽였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잘라 들고 궁내를 돌아다녔다. 그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목격담이다.

일부의 주장처럼 노론 집안인 친정을 비호하려는 마음에 혜경궁 홍씨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세자 본인의 입으로도 그 사건을 시인하고 내관 김한채를 위해 휼전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다.


정조가 읽고는 타이틀을 '천유록'을 '대천록으로 직접 고쳐준 책 속에 사도세자 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들어있다.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

사도세자는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였다.


이는 영조가 직접 말한 내용이며,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의 왕자 중에도 살인에 관여하고도 왕이 된 왕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방원과 수양대군 등이다.
그러나 그 살인은 쿠데타나 권력 다툼의 와중에 일어났으며 그 경우에도 왕자가 직접 때려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드물다.
연산군이 포악하다 하나 직접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다.

때리다 말았고 결국 다른 사람이 죽였다.


세자가 무고한 사람을 100여 명이나 직접 살해한 경우는 동서양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날 밤 영조는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다.

그 첫마디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지 않았느냐?”
영조는 ‘박살’이라고 했다. 박살은 손으로 때려서 죽이는 것 아닌가. 세자가 제 자식을 낳은 후궁을 때려서 살해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참혹한 행위가 극에 달했음에도 모두 쉬쉬했다. 병으로 한두 사람을 때려죽인 수준에서 벗어나 습관적 살인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도 살해당했다.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 용납될 수준이 아니건만 모두들 입을 다물었는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결국 일은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폐세자반교문에 나오는 선희궁 영빈 이씨의 증언이다.
“요사이 그곳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이런데도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성리학이 통치이념인 조선에서 무고한 백성 100여 명을 직접 살해하고 친모의 내인을 죽인 자가 왕이 될 수는 없다.
맹자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제선왕의 질문에, 인을 해치고 의를 해치는 자는 군주가 아니므로 군주를 시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죽여도 좋다고 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왕이 되면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올 것이 예고된 사람일 뿐이었다.
영조조차 이렇게 친제 묘지문에서 말한다.
“아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시절에 이런 자, 나 듣지 못했다.
세자의 이런 패악은 일찍이 전라도에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가?
전라도 용안(익산)현감이던 이정은 그 소문을 상소하면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세자의 그 패악이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백성들은 수군거리고 희생자는 늘어나기만 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장인인 홍봉한은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대신들은 세자를 비호하면서 병으로 인해 생긴 아무것도 아닌 사건인 것처럼 말한다.
신하들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그의 습관적 살인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 기대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세자는 죄책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고한 백성을 더 죽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아버지 영조에게 반발해 두 번이나 우물에서 투신자살 소동을 벌인 불효를 저질러도 영조가 너무 심하게 대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죄 없는 백성을 무수히 죽여도 병에 의한 것일 뿐이며 기본적으로 세자의 자질은 훌륭했다고 설명한다.
친어머니가 영조의 신변이 위험하니 세자를 죽이자고 말해도 오히려 궁중의 여인이 국본을 흔들었다고 말하고 만다.
당시 신하들이 한 이야기다. 당시 신하들의 태도도 문제가 많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은 그 태도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세자의 살인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을까? 그 출발점은 『승정원일기』가 삭제된 영조52년 2월일 것이다.
정조의 효심은 아버지를 흉악한 살인마로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그래서 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졌다.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는 사도세자 관련 부분에서는 유독 너덜너덜하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갔다.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는다. 여기에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승정원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此下一張刀削 丙申因傳敎洗草]”
그 후 민간기록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정조는 『현륭원지』를 작성하면서 단 한군데에서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언급하지 않는다.
현륭원지』를 읽은 사람이 어찌 사도세자가 흉악한 연쇄살인범임을 알겠는가?
게다가 영남학자들은 만인소를 올리면서 사도세자 의 억울함을 밝히겠다고까지 했으니...
역사의 조작을 반드시 악인이 하는 것만은 아님을 잘려나간 『승정원일기』는 잘 말해준다.
진실을 오려내는 역사조작을 효심 가득한 계몽군주 정조가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래서 오늘날 경기도당굿에서는 수많은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도세자를 신처럼 모시며,
방송 드라마는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그려 시청자들은 눈물로 그를 동정하게 되었다.
시중 서점에는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도세자는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역사서까지 진열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당쟁에 사로잡혀 자식을 죽였다는 설명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효심 가득한 정조가 저지른 역사조작, 250년이 지난 지금도 얼마나 성공적인가?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퍼와봅니다.
역사의 조작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지만, 사실 저걸 조작이라고 하기엔 실록에 그 정황이 너무 노골적으로 나와있지요.
아래는 정조가 세손시절 승정원 일기의 내용을 지워달라 애원하는 기사입니다.
 왕세손(후에 정조)이 수은묘(垂恩廟:사도세자의 묘)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재실(齋室)에 나가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고 하령하기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경들을 소견하였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목메어 스스로 견디지 못하다가 하령하기를,
“그때의 처분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마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어서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데, 이제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지금에 이른 것도 이미 사람의 도리로 견딜 것이 아니거니와, 완고하게 아는 것이 없는 체한 것은 다만 대조(大朝)께서 위에 계시고 또 그때의 처분에는 감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그지없는 아픔을 생각하면 어찌 일찍이 먹고 숨쉬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늦추어진 적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또 대조의 명을 받아 외람되게 송사(訟事)를 듣고 판단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모년(某年)의 일기(日記)를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지금의 의리로는 모년의 일에 대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다시는 눈을 더럽히고 이[齒]에 걸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 사초(史草)로 말하면 명산(名山)에 감추어 만세(萬世)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는, 일기는 이것과 달라서 그것이 있든 없든 관계되는 것이 없다. 이제 이것을 내가 청정(聽政)한 뒤에도 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백료(百僚)를 대하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억제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하고는 눈물이 비오듯하니, 좌우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정조가 세손 시절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사도세자에 관한 기록을 지워달라 애원하는 장면.
사초는 감히 어떻게 해달라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일기는 중요치 않으니 지워달라 울며 애원합니다.
그러나 영조는 이 요구를 거절하는 듯...하다가 결국 일기를 세초해버립니다.)
임금(영조)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이번에 하교한 것은 나라를 위하고 충자(沖子)를 위한 것이나,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비사(秘史)는 의논할 수 없더라도, 《정원일기(政院日記)》로 말하면 천인(賤人)들도 다 보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 것이다. 사도(思悼)가 어두운 가운데에서 알면 반드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유족(裕足)을 끼치는 뜻이겠는가? 비사가 이미 있으니 일기가 있고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오늘 시임(時任)·원임(原任)이 마침 입시(入侍)하였으므로 이미 하교하였다. 승지(承旨) 한 사람이 실록(實錄)의 예(例)에 따라 주서(注書) 한 사람과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하라. 내 마음은 종통(宗統)에 대하여 광명(光明)하나 이 일은 수은(垂恩)에게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이번 하교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무신년의 흉도(凶徒)의 남은 무리로 엄히 징계할 것이다. 다들 반드시 이 말에 따르고 국법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
(정확히 말하면 정조가 직접 조작을 한 건 아니고 세손시절 영조에게 간청을 해 허락을 얻어낸 것이지요.
또,사도세자가 왕손의 어미, 즉 후궁을 때려죽인 것에 대한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대화 역시 실록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세자가 죽인 여인)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
(재미있는 건 이 직후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행실을 옹호해주기 급급하고,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지적하는 게 아닌 이 일을 고한 나경언을 죽여야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제목은 역사 조작이라 이야기 했고 그에 대한 지적을 본문으로 이야기 했지만,
조작하려고 해도 결국에 기록이 남는 것이 또 역사인듯 싶습니다.
이렇게 기록이 다 남아있는 걸 보면요.

이복형인 효장세자(진종으로 추존)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10세 때 혼인해 곧 별궁에 거처하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매우 영특해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우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떼었다. 또한, 글씨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세 때에는 이미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 세력인 노론들이 처결한 바 있는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해 서정을 대리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영조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한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그는 격간도동이라는 정신질환에 걸렸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한 나라의 서정을 맡고서도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그 병의 증상에 대해 그의 장인인 홍봉한은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1761년에 계비 김씨의 아비인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영조는 마침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하였다.

장조가 죽은 뒤 영조는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 때는 친히 나아가 스스로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고, 1899년에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사도세자가

태어나고 막 돌이 되자마자 왕세자에 책봉. 영조는 나이 마흔에 얻은 사도세자가 너무나도 이쁘고 대견스러워서 왕세자로 책봉했으나 이것부터가 사도세자에겐 비극의 시작. 사도세자가 왕세자가 되면서 생모와 떨어져 동궁전에 기거하게 되었고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이 사도세자의 시중을 듬. 궁인들은 세자의 생모 영빈이씨가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헐뜯고 업신여겼으며 세자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사랑도 제


대로 받지 못한채 자람 

경종 시절 온갖 고생을 겪으며 믿을 건 자신밖에 없다는걸 알고 완벽주의자가 된 영조는 사도세자도 그렇게 완벽한 왕으로 만들기 위해 엄격하게 키움. 사도세자가 4살때부터 구박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 앞에서 세자를 망신주기를 반복함. 날씨가 좋지 않으면 사도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런거다라고 까서 9살의 사도세자는 항상 오늘 날씨가 어떤지를 물어봄 

공식적인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정성왕후(사도세자는 영빈 이씨에게 태어난 즉시 정성왕후의 자식으로 입적됨)가 병환이 깊어지자 사도세자는 인삼물을 손수 떠먹이며 통곡하였는데 영조가 들어오자 울던것도 멈추고 방 구석에 쳐박혀 벌벌 떰. 영조가 어린 사도세자를 정신적으로 심하게 학대했다는걸 보여주는 대목.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질문을 던져 사도세자가 뭔 대답을 하던 별 시덥잖은 이유로 질책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문제하고 한 무제 중에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자 사도세자가 "한 문제입니다"라고 답하자 "이는 나를 속이는 답변이다! 너는 분명 무제를 통쾌히 여기고 있을 텐데 어째서 문제가 낫다고 하느냐?" 라고 강하게 질책함 
그리고 “너는 앞으로 문제·경제의 반 정도만으로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양 한나라 무제로 너를 경계했는데,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글귀가 있어 기(氣)가 크게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며 갈굼 

영조는 자주 자신이 왕권에 욕심이 없다는걸 어필하기위해 선위쇼를 벌이곤 했는데 이때마다 애꿎은 고생을 한게 사도세자 
영조는 사실 왕권을 남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지만 정치적 용도로 선위쇼를 벌였고 그때마다 사도세자는 바닥에 엎드려 명을 거두어 달라고 빌어야만 했음. 사도세자가 15살때 영조는 선위쇼를 벌이고 사도세자와 신하가 반대하자 그럼 선위말고 대리청정이라도 해 라고 해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게 됨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나는 앉아서 지켜보겠다. 세자 너는 신하들 말에 그냥 알았다 하지 마라.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다시 물어보고 의견을 참작한 다음 결정해라." 라고 해놓고 사도세자가 뭔 결정을 하면 "너의 말이 맞긴 한데, 애초에 그거 내가 한 건데 왜 니 멋대로 해? 나에게도 물어봐야 될 거 아니냐." 라고 꾸짖음. 그리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일을 처리함 
그래서 사도세자가 모든일을 다 영조에게 아뢰고 어떻게 할지 물어보면 그런것도 자기 스스로 결정 못하고 물어본다고 깜. 이에 사도세자는 눈물을 흘리다 혼절하고 궁인들에게 실려나가기 여러번이었고 신하들은 보다못해 그만좀 세자를 구박하라고 영조에게 항의함 

. 영조는 지나치게 강박증에 깐깐한 성격이라 자기가 보기 싫은걸 보면 눈을 씼고 듣기 싫은 걸 들으면 귀를 씼곤 했음. 한번은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밥 먹었느냐라고 묻고 사도세자가 네라고 대답하자 사도세자 보는 앞에서 귀를 씼음. 또 영조는 자식들에 대해 좋아하는 자식은 지나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자식은 지나치게 싫어하는등 호불호가 심했는데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는 후자.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서로 우리 남매는 아버님 귀 씻을 물이다라며 위로하던 사이였고 사도세자는 화협옹주를 유독 애달파하며 챙겼으나 사도세자가 18세일때 홍역이 돌아 화협옹주가 사망함. 
사도세자도 이때 홍역을 앓았었는데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못했다는 이유로 눈 내리는 한겨울에 3일동안 석고대죄를 시킴. 그리고 화협옹주가 사망한지 2주도 안되어 영조는 다시 한번 선위쇼를 벌였고 누이를 잃은 슬픔과 홍역앓이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사도세자는 무려 10일간 또 눈밭에서 석고대죄를 하게됨.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자신이 시를 읽는동안 너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다는걸로 판단하고 전교를 거두겠다고 하고 사도세자는 애를 써서 눈물을 흘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석고대죄가 소극적이라고 화를 냈고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위해 머리를 바닥에 쾅쾅 찧어 피범벅이 되어야 했음.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가 병이 들어 앓아눕자 사도세자는 당연히 어머니의 병문안을 감. 여기서 자기의 누이인 화완옹주를 만남. 화완옹주는 화협옹주와는 달리 영조가 엄청나게 이뻐하는 딸이었음. 화완옹주도 영빈이씨의 자식이니 병문안을 온거고 사도세자와 화완옹주 둘이 만난건 우연이었는데 이를 본 영조는 엄청나게 화를 내며 사도세자보고 꺼지라고 함. 사도세자는 허겁지겁 창문을 넘어 달아났고 영조는 동궁을 나와 청휘문 안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꾸짖음. 사도세자도 이에 폭발해서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이런 대접을 받으니 억울해서 약먹고 자살하겠다고 울부짖다가 여러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진정됨. 영조는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딸" 화완옹주가 "자기가 가장 증오하는 아들" 사도세자가 함께 있는것도 극도로 싫어함. 
이로인해 정신질환이 생긴 사도세자는 동궁전에 있지 않고 취선당에 음식을 만드는 곳인 밧소주방에 자주 멍하니 서있곤 함. 그곳이 깊고 고요하여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이유였음. 그때 영조가 갑자기 이곳에 들이닥쳐 사도세자보고 술을 마셨다고 닥달함. 당시 영조는 금주법을 내려 술을 엄하게 금지하고 있었고 사도세자가 옷이 풀어헤쳐진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에 술을 먹었다고 단정한것임. 겁에질린 사도세자는 술 먹지도 않았는데 먹었다고 자백했고 이를 보다 못한 사도세자의 보모 최 상궁이 "술을 먹었으면 술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소서" 라고 항의하기도 함. 사도세자는 이에 최상궁보고 "먹고 아니 먹고 내 먹었노라 아뢰었으면 자네 감히 말을 할까 싶은가. 물러가라" 라고 꾸짖었고 이에 영조는 "어른 앞에서는 견마도 꾸짖지 못 하는데 너는 어떻게 내 앞에서 최상궁을 꾸짖는거냐" 라고 사도세자를 꾸짖음. 그리고 신하들을 시켜 사도세자를 '훈계'하라고 지시함. 이에 원통함이 터진 사도세자는 자신을 훈계하러 온 신하들에게 욕을 하며 쫒아내는데 이 와중에 촛대가 쓰러져 화재가 남. 영조는 이를 사도세자가 일부러 방화했다고 생각해서 사도세자를 신하들 앞에 세워놓고 "네가 불한당이냐?" 라고 꾸짖음. 
사도세자는 겁에질려 아무말도 못하고 그 굴욕을 감수한뒤 억울함에 나 이렇게는 도저히 못살겠다며 낙선재 우물에 몸을 던짐. 간신히 신하와 나인들이 몰려들어 건져내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음.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일인 매년 1월 21일마다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사도세자를 세워 놓고 깜. 생일때마다 생일상은 커녕 영조에게 욕을 먹으니 세자는 생일때마다 전전긍긍함. 하도 이에 시달리다보니 사도세자 사망 2년 전 생일에는 서러움이 폭발해서 상욕을 하며 화내고 서러워하며 살아 뭣하겠냐며 세손 남매가 문안을 와도 부모도 모르는 것이 자식을 어찌 알겠냐 만나보지도 않음. 

사도세자는 세자의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해 1760년 세자가 온양으로 거동할때는 호위병력이 고작 500명뿐이었고 세자의 뒤를 따르는 세자의 사부와 빈객들도 한명도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일국의 세자의 행차가 고작 이정도냐? 라는 탄식을 하기도 함. 이때 여름에 가뭄이 심했는데, 영조는 이것 역시 모두 다 세자 때문이라며 욕설을 했고 사도세자는 견디지를 못함. 
사도세자는 좁거나 어두운 데 혼자 있으면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강박증인 의대증에 걸렸음. 
옷을 입으면 영조에게 가서 질책을 들어야 하는데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니 아예 옷 입는거 자체를 두려워함. 한 벌을 제대로 갈아입지를 못하고 옷을 불사르기도 하며 옷이 귀신인지 아닌지 걸어두기도 함. 
사도세자도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걸 잘 알고 있어서 장인과의 편지등을 통해 자신이 정신병에 걸린것을 한탄함.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 
경종시절에 온갖 죽을 고비를 다 겪었다는 영조도 고작 4년만 참으면 되었으며 선조에게 핍박받았다는 광해군도 10년만 참으면 되었음. 하지만 사도세자는 하필 영조가 조선왕중에서도 역대급으로 장수하였기에 자기가 뒤주에 갇혀 죽을때까지 20년 이상을 영조의 갈굼속에서 살았음. 
심지어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임오화변이 있은지로부터도 14년이 더 지나서야 영조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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