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 선산 비봉산-형제봉    

해발; 비봉산-122.2m,형제봉-531m

위치; 경북 구미시 선산읍과 옥성면 일대

소개;

   형제봉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바위 다운 바위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위가 귀하다 보니

   기차 바위나 부처 바위에 품위 바위로 등록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형제봉은 도심 속 공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알러져 있는 반면에 신산은 완전한 푸대접이다.

   아니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물론 사람들의 발길까지 뚝 끊겨져 대접이란 단어 조차도 붙이기 어색한 정도이다.

   때문에 신산은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산길이 거칠다.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나 봉() 따먹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신산까지 찾을 필요는 없을 같다.

   그러니 부처 바위에서 하산을 하다가 영봉정과 비봉산을 둘러 보는게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산행일자; 2016.06.30.목요일.흐림

산행코스;

   선산 충혼탑 주차장-비봉산 공원 입구 안내판-비봉산-영봉정-437봉-부처바위- 갈등고개-임도-목계단-헬기장

  -형제봉-산불 감시초소-496.2봉-정자-기차바위-안내판-주공 아파트-원각사-선산 충혼탑 주차장

  -원점회귀 산행

산행시간; 중식포함 5시간

가는 길;

   대구 성서 홈플러스-신천대로-서대구IC-금호JC-경부 고속도로-선산IC-죽장 교차로/선산,구미 방면

  -이문 삼거리/선산 읍사무소 방면-선산 충혼탑

  (네비;경북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 산 1-3번지-62.4km.47분 소요,통행료 2.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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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 산행할 형제봉,비봉산 산행 들머리는 선산 충혼탑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홍살문 아래를 지나 충혼탑 방향으로 계단을 오르면 

 

충혼탑 계단 입구 우측에는 선산 출신 유공자 공적비가 있으며,

 

충혼탑 계단 입구 좌측으로는 '비봉산 공원 입구' 안내판 방향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

충혼탑에 올라 탐방 후 다시 이 곳으로 되돌아와 비봉산 공원 입구 방향으로 산행을 한다.

 

계단을 올라 선산 충혼탑 앞에 도착하여 본 충혼탑의 모습이다.

 

충혼탑 계단을 내려와 비봉산 공원 입구 안내판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산사면길을 따라 3-4분 가면 '출발점'이란 이정표 앞을 지난다.

 

이어 만나는 목다리를 지나 다시 3-4분 가면

 

널찍한 공간에 정자와 체육시설,벤치,안내도가 있는 해발122.2m의 비봉산에 도착한다.

 

 

비봉산은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에 날으려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동쪽으로는 교리 뒷산,서쪽으로는 노상리 뒷산이 있어 두 날개이며, 출장소 뒤의 봉우리가 몸과 모가지가 된다.

 가운데의 봉우리 아래에 출장소가 자리 잡고 있어 봉의 입이 옛 군청사를 문것과 같다 한다.

 비봉산은 북쪽에서,금오산은 남쪽에서 서로 안을 지키고 감천은 동으로 흘러 낙동강과 이어저

외부를 지키면서 아주 튼튼한 천년의 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선산 주민들에겐 큰 걱정이 있었다.

비봉산의 봉새가 날아가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아읍 황당산에 그물을 친다는 의미로 동네 이름을 '망장(網張)'이라 했으며,

물목 동네 뒷산을 '황산(凰山)'이라 이름 지어 짝을 맞추기도 했다.

그것은 봉(鳳)은 수컷이요,황(凰)은 암컷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산읍 사방 동네를 죽장(竹杖)이라 하여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 순으로 먹이를 대어 주고,

화조리 또한 봉황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하여 만화백조(萬花白鳥)가 있다는  뜻이며,

다시 동리 이름을 영봉리라 한 것은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며,

무래리 역시 봉황이 날아 오르는 것을 뜻한다.

 

출발점에서 0.5km 위치에 있는 널찍한 공터인 비봉산 정상에는

비봉산 종합 안내도와 장성과 정자,약간의 체육 시설,쉼터인 벤치가 마련되어 있다.

 

비봉산에서 영봉정까지는 0.8km다..

 

비봉산에 올라 좌측으로 바라보면 

선산 고등학교와 교정이 보이고 형제봉을 들린 후 하산하는 산능이 보인다.

 

비봉산을 지나 영봉정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넒은 등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산을 찾는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비봉산을 지나 첫번째 만난 쉼터다.

 

쉼터를 지나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서면 시음대에 도착한다.

비봉산 산림욕장 이용객의 편의를 위하여 지하 223m까지 암반을 굴착한 관정으로

수질 검사 결과 음용수로 합격 판정을 받아 안심하고 마실수 있는 천연지하수라고 한다.

 

시음대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길에 목계단을 오르면 좌측으로 '비봉산 유래' 설명판을 만난다.

 

비봉산 유래는 아래와 같다.

선산읍을 감싸고 있는 비봉산은 글자의 뜻 그대로 봉황이 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봉황은 역사상 상그러운 새로 생김새는 닭의 머리,뱀의 목,ㅈ비의 턱,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 등을 하고,

키는 6척 가량이며, 목과 날개에는 5색 밫 찬란하고 다석가지의 울음소리를 내며

성품이 어질고 청결하여 나는 새 가우데 왕이라 칭한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순이 아니면 먹지 않으며 신선한 물만 마시고 산다고 하며

성인군자가 나야만 이 새가 나타나는데 용,거북,기린과 함께 사령이라는 전설의 성스러운 새라 한다.

지리학설에 의하면,

비봉산은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에 날으려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동쪽으로는 교리 뒷산,서쪽으로는 노상리 뒷산이 있어, 두 날개이며 출장소 뒤의 봉우리가 몸과 모가지가 된다.

가운데의 봉우리 아래에 출장소가 자리잡고 있어 봉의 입이 옛 군청사를 문 것과 갗다 한다.

나는 것일까? 날으려는 것일까? 늠름한 기상,수려하고 장엄한 기상은 정말 선산의 鎭山이요,

산중에 산으로 名山이며 산의 祖宗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선산주민들에겐 큰 걱정이 있었다. 비봉산의 봉새가 날아가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아읍 황당산에 그물을 친다는 의미로

동네 이름을 "망장(網張)"이라  해으며,물목동네 뒷산을 "황산(황산)"이라 이름 지어 짝을 맞춰주기도 했다,

그것은 봉(鳳)은 수컷이요, 황(凰)은 암컷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산읍 사방동네를 죽장이라 하여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 순으로 먹이를 대어주고,

화조리 또한 봉황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만화백조라 있다는 뜻이며,

다시 동리 이름을 영봉리라 한것은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며,

무래리 역시봉황이 날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 뿐만 아니라, 봉황은 알을 다섯 개를 낳는데 한 개는 이미 앞들에 있는 동산이므로

다시 네 개의 동산을 만들어 다섯 개의 동산이 되게 하였다,

이것은 이 다섯 개의 알을 영원히 깃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다섯 개의 동산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허물어져 1966년 경지 정리에 따라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한 개의 동산만이 남아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장군이 이 산을 보고 인재가 많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봉산 주령 허리를 끊고 장작으로 불을 질러 피우고 큰 쇠못을 꽂았다고 전하여 온다.

 

어디로 가던 만나는 상.하 갈림길을 지나면

 

내리막길로 내려가면 '선산의 역사'라는 문헌판을 만난다.

 

내역은 아래와 같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13),지방제도개편때 선주는 선산군으로 개명되었고,

인동현은 현명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각기 군수,현감이 파견되었는데,선산군은 2년 뒤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세조때의 진관 체제 성립에 따라 선산부는 경상도 우병영 상주진관에,인동현은 좌병영 대구진관에 각각 속하게 되었다.

당시 이곳의 토지는 선산 지역이 비옥한 반면 인동 지역은 비옥,척박이 반반이며,

풍속은 선산이 화려하고 학문을 좋아한 반면,인동은 검솔(儉率)하고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호구수는 선산이 1,005호에 1만2012인,인동이 657호에4,551인 이었다고 하는데,

구미시 지역의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다.

한편 고려말 이래 이곳은 학문적인 연원이 깊은 곳으로 이름나,

'조선인재 반은 영남인재(朝鮮人材半在嶺南)이며 영남의 인재 가운데 반은 선산에 있다(嶺南人材半在一善)"

라는 말조차 나오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이곳의 금오산성 및 천생산성의 역할이 중요시 되어 축성이 계속 이루어졌고,

1735년(영조11)금오산성에는 독진(獨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들어와 면리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구미 지역도 역사의 표면에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지역은 상고면과 하고면으로 각각 14개,23개의 자연촌락을 관할하였다.

신라시대-일선군,일선주,숭선군등으로 불림

고려시대-선주,일선현 등으로 불림

1413,   -조선 태종 13년부터 선산군으로 개칭

1963,1.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

1978,2. -구미읍이 칠곡군 인동면을 편입하여 시로승격

1995,1. -구미시와 선산군을 다시 합쳐 통합구미시 발족

 

오르막길에는 우리 고장의 인물 안내판과

 

우리고장의 인물의 내용은 이러하다.

김주(金澍)

고려의 충신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조선이 개국하자 귀국하지 않고 망명하였다.

고려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분이다, 유적으로 부조묘,충열당과 신도비(도개면 궁기리)가 있다.

길재(吉再,1353-1419)
고아 봉계(봉한)에서 태어났다,고려가 망하자 조선에 벼슬을 하지 않은 충신이며,

금오산에 돌아와 후학을 가르쳐 조선 유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이다,금오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유적으로 채미정(금오산),지루중류비(오태동)등이 있다.

이맹전(李孟傳,1392-1418)

형곡(댓샘)에서 태어났다,문과급제,세조에 의해 폐위된 단조에 충성한 생육신 가운데 한 분이다,

유적으로 경은 이맹전 선생 유허비(형곡동)가 있다.

하위지(河緯地,1412-1456)

선산 영봉(이문)에서 태어 났다.

문과장원급제,세조에 의해 폐위된 단종을 복위 하려다 참형당한 사육신 가운데 한 분이다,

유적으로 단계 하위지 선생 유허비(선산 단계천)가 있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

선산 영봉이 고향이나 밀양 외가에서 태어났다.

길재 선생과 아버지 김숙자 선생으로부터 유학을 배워 영남사림파의 큰 스승(宗師)이 되었다,

금오서원에 배향 되었다.

김응기(金應箕,1456-1519)

도개 신곡에서 태어났다. 문과급제,좌의정, 영중추부사 역임,문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붕(鄭鵬, 1467-1512)

한휜당 김굉필 선생의 문도, 학자이자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금오서원에 배향되었다.

박영(朴英,1471-1540)

문무를 겸하였고, 대학을 주로 공부하여 '대동학자'로 불렸다.

유적으로 송당정자와 신도비(선산읍 신기리)가 있다, 금오서원에 배향되었다.

박운(朴雲, 1493-1562)

해평 고리실에서 태어났다,송당 박영 선생의 제자로 ㅎ행과 학문이 뛰어났다,

유적으로 효자정려비(해평면 괴곡리)가 있다, 낙봉서원에 배향괴었다.

김취문(金就文, 1509-1570)

고아 원호에서 태어났다.

김취성 선생의 아우로 송당 박영 선생의 제자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감사,부제학 등을 지냈다.

황기로(黃耆老,1521-1567)

고아 망장(대망)에서 태어났다.명필로 이름이 높았는데 특히 토서에 뛰어나 '초성'이라 하였다.

유적으로 매학정(고아면 예강리)이 있다.

고응척(高應陟, 1531-1605)

해평 문량에서 태어났다. 문과급제,시문에 뛰어났다. 낙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인동 남산에서 태어났다. '여헌학파'로 부르는 독자적인 성리학 체계를 형성한 학자이다.

금오서원과 동락서원에 배향되었다.

최현(崔晛, 1563-1640)

해평면 해평에서 태어났다.

문과급제, 한강정구 선생, 학붕 김성일 선생의 문도이며 임진왜란,병자호란에 의병으로 참전하였다,

선산의 인문지리지인 [일선지]를 지었다.

박록주(朴祿珠,1905-1979)

고아 관심에서 태어났다.판소리 명창으로 주요무형문화재 제5호이었다.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상모동에서 태어났다.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을 지냈다.

 

평상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서울이 못된 선산 설명판.

 

서울이 못된 선산의 내역은 아래와 같다.

옛날 임금이 서울을 옮길 것을 계획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할 수 있는 왕도의 터를 찾아

금수강산 곳곳을 아무도 모르게 순행 다니시다가 선산읍에 당도 하였다.

선산의 산천을 둘러보니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곳보다 왕도로서 가장 적합한 곳이다,

서남쪽으론 병풍같은 자연의 산성이 둘러 있어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동으로 낙동강, 남으론 감천의 두 강이 있어 또한 적을 방어하기에 좋으며,

우뚝 솟은 금오산, 냉산,갈미봉은 먼곳의 적의 형편을 살필 수 있는 봉화대로 천연의 요새지이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그 첫째 조건인 산골을 일일이 세어 보았더니

백 골짜기에서 하나가 모자란 아흔 아홉 골이라 왕도로서 첫째 조건이 미비한 것이다.

선산땅을 서울로 정하지 못한 애석감을 이기지 못하여 왕은 이틀을 이곳에 더 머물다가

또 다시 도읍 터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읍내 노상리 산 밑에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농민이 있었다.

그는 육십고개를 2,3년 앞둔 늙은이였는데, 그에겐 나이 열 아홉 살과 열 일곱살 되는 두 딸이 있었다.

아들도 없는 그 늙은이는 수년 전부터 맏딸의 혼처를 백방으로 구하였으나,마당한 자리가 없었다.

삼월 열 아흐레 날이면 봄 향기가 무르익어가는 계절이다.

말 같은 두 처녀는 드디어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동네 사람들의 눈을 패해 가면서 앞들을 향해 나선 것이다.

꽃다운 나이의 처녀 자매가나물을 탤 생각으로 더나쓰나,

두 처녀는 나물 캘 생각도, 집으로 돌아갈 마음도 없이 멍하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바로 이대였다. 어디선가 우렁찬 음악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깨뜨리고 들리는 것이 아닌다?

순간, 두 처녀는 본 정신으로 돌아와서 귀를 기울이며 이 음악소리를 들었다.

"선산이라 좋은 고장 한 골없는 백골이라  하느님이 선사하사 이동산을 보내신다

뒷골백골 수채워서좋은황터 되옵시고 시화연풍 국태민안 길이길이 번영하라"

천사들의 노래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두 처녀는 문득 동시에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멀리 금오산 저편에서 뒷골 갈미봉까지 오색이 찬란한 쌍무지개 다리가 하늘 높이 놓여 있고,

수 많은 어린 천사들이 산봉우리를 메고 이쪽을 향하여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동네사람들 큰일났소, 산봉우리가 하늘 높이 떠오니 이 고장 사람들은 다 죽었다!"

두 처녀는 혼비백산하여 바구니,호미,짚신을 그 자리에 둔 채 허둥지둥 맨발로 집까지 뛰어와서

방안에서 이불을 푹 덮어쑤고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어린 천사들은 발걸음을 멈추며 두 처녀의 행동이 요사르헙고 불길한 징조라 하여,

메고 오던 산봉우리를 두 처녀의 놀던 자리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동시에 하늘에 먹장같은 구름이 순식간에 모여들더니 천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찬란하던 쌍무지개도 자취가 없어진 것은 물론이다,

다만 들 가운데에는 여태껏 없었던 한 동산이 자리잡고 있었을 뿐이다.

평화로운 고을 선산의 밤은 깊었다, 늦게 솟은 하현달이 수많은 별들의 속삭임을 비추어 주며 듣고 있었다,

첫닭 소리가 들리기 조금 전이었다.

왠일인지 먹물 같은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삽시간에 암흑 세계로 변하여 우레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번개불은 세 번이나 번쩍이곤 하였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다. 정신을 차린 이 고장 사람들은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또 하나의 기적은 노상리 막바지에 있던 집과 두 처녀와 늙은 부모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일이다

 

봉황이 머문 비봉산 등 안내판을 지난다.

 

곳곳에 선산읍민들이 자부심을 가질수 있는 선산의 유래와 배출 인물 등이 기록된

여러가지 문헌이 세워져 있는 지점을 지나며 영봉정을 오르는 갈림길에 도착한다.

어느쪽으로 올라도 무방하지만 경사진 곳으로 오르면 400m이고 왼쪽 산사면길은 500m다.

충혼탑에서 1.0km 지점으로 산행를 시작한 지 30여분이 지난 시점이다.

왼쪽 평탄한 산사면길을 택하여 돌아가면

 

 산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올라

 

절개지 아래를 지나면

 

영봉정이 0.1km 남은 매트길을 따라 오른다.

 

영봉정 입구 삼거리에 도착한다.

 

영봉정 입구 삼거리에 놓인 이정표.

좌측은 영봉정(부처바위 2.4km)으로 오르지 않고 가는 우회길이며

 

 직진하여 오르막 목계단으로 오르면 영봉정으로 가는 등산로다.

 

목계단을 올라가면 영봉정에 도착한다.

 

 

 

영봉정에서 보는 선산 시가지의 모습이다.

아래로 보이는 능선은 이 곳까지 올라온 능선이다.

 

영봉정 입구에서 이 곳까지 오른 목계단이다.

 

영봉정에서 형제봉으로 가기 위해 영봉정을 내려서면 만나는 선산 영봉정 설명판.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시민의 번영을 축원하고 건강한 심신도야(心身陶冶)의 공간으로 활용코자

선산 시민들이 즐겨 찾는 비봉산 매봉에 전망대를 설치하니 학문이 천명(闡明)되어

휼륭한 인물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시민의 운세(運勢)는 솟아 오르는 태양과 같고

무성한 숲처럼 번영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선산영봉정(善山迎鳳亭)을 건립하였다.

 

영봉정 설명판을 지나면 곧바로 만나는 삼거리 갈림길이다.

좌측 오르는 길은 체육 시설이 있는 길이고 우측은 우회하는 길이므로 어디로 가던 만난다.

좌측 오르막길을 올라

 

벤치와 체육시설이 있는 곳을 지나면

 

벤치와 체육시설이 있는 곳에서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이정표와 다목적 사각 이정표가 있는 영봉정에서 0.1km 지점인 네거리 갈림길이다. 

좌측에서 오는 등산로는 영봉정 앞 갈림길에서 오는 길이며,

우측은 조금전 우회하여 오는 길이다.

 

부처바위,형제봉 방향으로 직진하여 오르막길을 오르면

 

바위 지점을 지나

 

매트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올라가면 부처 바위로 가는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안내판이 가르키는 산사면길을 따라 좌측으로 가면

 

안내판을 지나 10여 분 산길을 따라 오르면 삼거리 갈림길을 만난다.

좌측은 청소년 수련관으로 하산하는 등산로며 우측은 부처 바위,형제봉으로 가는 등산로다.

부처 바위가 1.0km,형제봉이 2.8km남은 지점으로 영봉정에서 1.1km 오른 지점이다.

부처 바위,형제봉 방향으로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다시 삼거리 갈림길을 만나 이번에는 우측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왼쪽으로 보이는 산사면길을 택하여 오른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다목적 사각 이정표(비봉산/형제봉 01-04번)와 바위 지점을 지나

 

하늘이 보이는 능선으로 오르면

 

이정표를 만난다(영봉정 1.9km,쉼터 0.1km,부처바위 0.2km,형제봉2.0km)

 

이정표를 지나 조금만 오르면 만나는 다목적 이정표(빙송산 01-05번)에서

신산 갈림길이 있는 우측 방향으로 오르막길을 오른다.

 좌측길은 우회길이다.

 

능선을 따라가면

 

부처 바위가 있는 곳이 보이기 시작하고

 

다목적 이정표(비봉산 01-06번),체육 시설,평상이 있는 부처 바위다.

 

부처 바위에서 가야 할 첫번째 봉우리가 헬기장과 두번째 봉우리인 형제봉이다.

 

선산 뒷골의 모습이다.

 

초곡리 마을과 낙동강 건너 도개 월암리와 동산리가 보인다.

             

 

부처 바위에서 조망 후 0.5km 지나면 갈등 고개에 도착한다.

갈등 고개의 이정표(부처바위 0.5km,뒷골1.6km,임도/형제봉1.1km)에서

임도/형제봉 방향인 능선으로 오른다.

 

갈등 고개에 위치한 안내판.

 

다목적 이정표(비봉산 1-7번).

 

이정표

 

갈등 고개에서 임도,형제봉 방향으로 가면 조그마한 능선을 넘어

 

내리막 계단을 내려서면 이정표 앞 포장 임도를 만난다.

 

임도에서 뒤돌아본 계단.

 

이정표에서 포장 임도를 건너 왼쪽으로 오르막 목계단으로 오르는 등산로로 오른다. 

임도에서 형제봉으로 가는 이정표는 없다.

 

평탄한 능선길을 따라가면

 

바위 옆 능선길로 올라 매트가 깔린 봉우리로 오르면 

            

갈림길인 497m 봉에 올라선다.

봉우리에는 다목적 이정표(비봉산 01-08)와

이정표(부처바위 1.4km,임도 0.6km/헬기장 0.0.2km,형제봉 0.8km/솔바람길 1.3km)가 있다..

 

좌측으로 헬기장이 보이는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조금가면

 

헬기장이다.

 

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선산읍 시가지다.

 

헬기장을 지나 완만한 내리막 능선길로 내려가면

 

바위 사이를 지나면

 

매트가 깔린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안부에 내려서면 다목적 이정표(비봉산 01-09)를 만난다.

능선으로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능선에 올라서면

 

앞으로 나무 가지 사이로 형제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통나무 계단으로 오르는 형제봉 가는 길이다.

 

매트가 깔린 가파른 오르막 통나무 계단길,

 

산사면으로 오르는 통나무 계단을 오르면

 

갈림길 삼거리다.

직진하여 내리막길을 아래로 내려가는 등산로며,

형제봉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는 우측 오르막 등산로다.

 

우측으로 하늘이  보이는 매트가 깔린 통나무 계단을 올라서면

         

해발 531m의 형제봉 정상이다.

 

앞면

 

뒷면

 

안내도

 

멀리 상주 갑장산이 조망되고

 

고아 들녁과 낙동강이 조망된다.

 

 

하산은 산불 감시 초소 방향으로 하산한다.

 

능선을 따라가면 산불 감시 초소가 나온다.

 

산불 감시초소 좌측으로 바라보면 하산하는 봉우리들이 보인다.

 

옥성면 소재지가 조망된다.

 

산불 감시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하산길이다.

산사면길을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바위 사이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우측으로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조망 바위가 나온다.

옥성면 대원리의 대원 저수지와 중부 내륙 고속도로 선산 휴게소 환승 정류소가 보인다.

 

안부에 내려 봉우리로 올라

 

봉우리 아래로 내려 

 

완만한 오르막 봉우리로 오르면

 

좌측으로 휘어진 봉우리 능선을 따라가면

 

너럭 바위와 시루떡을 쌓아놓은 커다란 바위 옆을지나 돌탑이 있는 무명의 돌탑봉에서

 

돌탑봉을 내려가 커다란 바위가 있는 지점은  

좌측으로 죽장사로 하산하는 갈림길이다.

 

한번 더 커다란 바위 옆을 지나면

 

돌탑을 뽀족한 바위에 쌓아 놓은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는 무명봉이다.

 

무명봉의 미완성 돌탑을 지나 잠시 내렸다 다시 오르면

 

이번에는 조금마한 돌들이 많은 봉우리다.

 

커다란 바위 아래를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바위 위에 돌탑을 쌓은 아래로 내려간다.

 

바위 옆을 지나

 

죽장사로 하산하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으로 오르면

 

바위 사이를 지나

 

평탄한 능선길에 도착한다.

 

바위 사이를 지나

 

봉우리로 오르지 않고 좌측 사면길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이름 없는 묘소를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다시 만나는 묘소다.

묘소를 지나 내리마길을 내려가면

 

정자가 있는 쉼터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하산한다.

정자에서 1분이 채 안돼 우측으로 난 길 옆에 모습을 들어낸 기차 바위(?) 인 듯 하다.

 

기차 바위를 지나면 내리막길에 체육 시설과 벤치를 지난다.

 

벤치에서 산사면길을 따라 5분 정도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삼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하면 무을로 입구로 가는 길이며,

좌측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야할 주공/한효 아파트로 하산하는 길이다.

어디로 가야 할 지 결정해야 한다.

좌측 주공/한효 아파트로 하산하기로 한다.

 

좌측으로 나무 가지에 '주공/한효 아파트 가는 길(1.5km) 산불조심' 안내판 따라 내려간다.

 

산사면길을 따라 내려가면

 

텃밭 아래로 주공 아파트 103동이 보인다.

 

텃밭 사이를 지나 산길을 벗어나 울타리에 도착하면

마즈막 이정표에 도착한다.

기차 바위에서 0.7km 하산한 지점으로 형제봉까지는 3.7km다.

 

뒤돌아본 이정표 지점이다.

 

 주공 아파트 뒷담을 끼고 내려가면

 

원각사를 지나

 

원각사 입석에서 뒤돌아본 원각사와 주공 아파트다.

 

원각사를 지나 우측으로 가면

 

길 건너 비봉 지게차 현수막이 달린 곳에서 왼쪽으로 간다.

충혼탑으로 가기 위해서다.

 

선산 사우나 앞을 지나 곧장가면

 

노상리 마을 회관 앞을 지나

 

마루라는 간판과 비봉정이란 불갈비집 사이로 곧장 가면

 

금일 원점 회귀 산행 종점이 충혼탑 주차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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