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와 정여립 역모사건과  기축옥사    2016.12.29.목요일,맑음 

선조 22년(1589) 황해감사 한준으로부터 한 장의 장계가 올라왔다.

장계가 접수된 날 밤 삼정승 등 조정의 고위관리들이 급하게 들어왔다. 무언가 급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삼정승 등이 입시하자 선조는 신료들에게 한준의 비밀 장계를 내놓았다.

내용을 본즉 안악 군수 이축 등이 역모를 고변한 것이었다.장계에 말하는 역모의 주도자는 정여립이었다.

역모의 괴수로 지목된 정여립, 그는 누구인가?

기록에 따르면 전주 출신으로 출생 당시 아버지가 꾼 태몽에서 정중부가 나타났다고 한다. 고려시대 무신란을 일으킨 정중부가 나타났으니 아버지는 탐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몽이 그래서인지 정여립은 어려서 성품이 포악하였다. 15, 16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정희증이 현감으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정여립이 따라가서는 한 고을의 일을 전부 자기 마음대로 처단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전들은 정여립의 말만 따랐다고 한다.

이렇게 한때 ‘악장군(惡將軍)’이란 별명까지 들었던 정여립은 후에 정신을 차리고 과거 시험준비를 하여 스물다섯 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과에 급제하면 으레 관직에 진출하는 법이다. 그러나 정여립은 관직을 마다하고 서인계 인사인 성혼이나 이이를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는 한편 금구로 낙향해서는 학문에 전념하여 죽도선생(竹島先生)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선조 17년(1584) 노수신이 정여립을 천거하였다. 노수신은 김효원과 심의겸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김효원을 편든 사실로 인해 서인들에게 동인으로 지목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정여립뿐만 아니고 동인 측 김우옹과 이발을 함께 천거했던 것이다. 그 동안 야인으로 생활하던 정여립에게 노수신의 천거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정여립은 노수신의 천거를 받은 후에는 그 동안 평소 학문을 논의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라고 헐뜯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정여립은 선조의 눈밖에 나서는 계속된 천거에도 불구하고 관직생활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불만을 품은 정여립은 전라도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학문을 강론한다고 위장하면서 사람들을 모았다. 정여립은 또한 황해도에서 예전에 임꺽정과 같은 도적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곳으로 가서 처음에는 황해도 도사 자리를 청탁했으나 여의치 않자 변숭복·박연령·지함두 등 불만 세력을 포섭하였다. 이렇게 자기 세력을 모으던 정여립은 하루는 지함두 등과 황해도 구월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충청도 계룡산을 유람하고는 어느 폐절에 들어가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였다.

 

남쪽 나라 두루 다녔더니
계룡산에서 눈이 처음 밝도다.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
고개 돌린 용이 조산을 돌아보는 형국이니
아름다운 기운이 모였고
상서로운 구름이 나도다.
무기(戊己) 양년에 좋은 운수가 열릴 것이니
태평세월을 이룩하기 무엇이 어려우리요.

 

그리고 한번은 당대에 떠돌던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은 흥한다’라는 참언을 옥판에 새겨서는 승려 의연에게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 두게 한 다음, 후에 지리산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이것을 얻은 것처럼 하였다고 한다. 이 참언은 파자(破字)로서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것이다. 정여립이 심부름을 시켰던 의연이란 승려는 평소 각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떠들고 다녔던 인물이었다.

“내가 요동에 있을 때에 동쪽 나라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바라보고 한양에 이르니, 왕기는 전라도에 있고, 전라도에 오니 전주 남문 밖에 있다.”

전주 남문은 정여립이 태어난 곳이었다. 이렇게 정여립이 비밀스럽게 가졌던 조선왕조에 반역할 뜻이 어느덧 공공연하게 퍼지게 되었다. 즉 꿈도 꾸어보지 못하고 죽음으로 맞이하게 될 위기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자 정여립은 드디어 반란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규합한 군사들을 일제히 일으켜서 바로 서울을 침범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은 승려 의암의 밀고와 정여립의 제자인 안악의 교생 조구의 자백으로 드러났으며, 이 사실을 안 이축 등이 이를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이렇게 정여립의 반란 사실이 드러나자 조정에서는 정여립을 체포하여 직접 신문을 해서 그 사실을 밝히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를 알아챈 변승복은 3일 밤만에 금구로 달려가서는 정여립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날 밤 의금부 도사들이 정여립의 거처에 도착했으나 체포하지 못했다. 정여립은 이미 변승복 등을 데리고 죽도로 달아난 상태였다. 진안현감이 관군을 이끌고 정여립을 추격하였다. 관군의 추격을 받던 정여립은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르게 되고, 결국 변승복과 자기 아들 옥남을 먼저 죽인 후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두고 이 사건을 서인 측에서 조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조작의 중심에 서얼 출신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나 정치적으로 진출이 좌절되었던 송익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 조작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이 역모사건으로 인해 정치세력의 반전이 이루졌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연려실기술》에서는 이 사건의 여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참고된다.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은 기뻐 날뛰었고 동인들은 기운이 죽었다. 이것은 앞서 임금이 서인을 싫어하여 이산해를 이조판서 자리에 10년 동안이나 두는 사이에 서인들은 모두 한적한 자리에 있게 되어 기색이 쓸쓸해보였다. 그런데 역변이 일어난 후에는 갓을 털고 나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은 그 자리에 올라서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기에 꺼리는 바가 없었다.”

이 사건이 발각된 후 역모를 조사하는 책임자는 서인 측 정철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가혹하게 조사하였다. 그리하여 동인 측 인사들이 대거 처벌되었다. 이때 처벌된 인물들을 보면 이발·이길 형제, 정언신, 백유양, 최영경, 정개청, 김빙, 이언길, 유덕수, 윤기신, 유종지, 김창일 등 많은 수의 동인들이 처벌되었다. 이를 가리켜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때 화를 당한 사람 가운데 최영경은 죄인들의 국문 과정에서 나온 길삼봉이라는 인물로 지목되어 처벌된 인물이었다. 당시 죄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역적 모의 때 길삼봉이 상장군이 되고 정팔룡과 정여립이 그 다음이 된다.”

그런데 당시 죄인들의 문책 내용을 보면 길삼봉에 대해서 여러 말이 나왔다.

“전주 길삼봉 집에 갔더니 삼봉은 나이 60세쯤 되고 낯은 쇠빛이고 살이 쪘더라.”

“삼봉은 나이가 30세인데 키가 크고 낯이 여의었다.”

이처럼 인상착의나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각각 달랐다. 그런데도 정여립이 최영경에게 보낸 〈두류산에서의 약속〉이라는 서간과 인상착의 등이 길삼봉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게 정여립의 역모사건으로 시작된 조사 과정은 약 3여 년 이상이 경과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천 명 이상이 화를 당하였다. 그리고 역모를 고변한 박충간은 형조참판에, 이축은 공조참판에, 한응인은 호조참판에 제수되었으며, 이들을 비롯해 국청에서 죄인들의 심문에 참여했던 인사 22명을 평난공신에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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