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과 폐비 윤씨(숙의 윤씨;淑儀 尹氏          2012.08.14.화요일,맑음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의 계비이자 둘째 부인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윤기무와 고령신씨 사이의 딸)는 질투심이 많은 여자였다.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 밖에 없었다.

성종이 처소인 교태전에 들르지 않고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질투하여 후궁들을  잡아다가 추궁,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일삼다 성종의 눈밖에 났는데,

성종과 말싸움 중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낸 것이 화근이되어

연산군의 할머니(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 폐위가 되었다.

성종의 후궁인 정귀인,엄귀인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폐위를 부추기기도 하였다.

 

1473년에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의 신분으로  있다가 

그 이듬해인 1974년 공혜왕후가 죽자

공혜왕후의 3년상을 마친 1476년 음력8월8일(양력8월27일)에 숙의였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된지 3개월만에 연산군을 낳았고,

왕비로 책봉된지 3년만인 1479년.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어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인 6월2일(양력6월21일)폐비가 된 것이다.

폐비된 이후 조정에서는 

폐비 윤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켜야 된다는 상소와 시위로

많은 조정 대신들이 파직 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1479년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인수대비(수양대군의 맏며느리)는 어린 연산군이 더 자라서 어미 얼굴을 기억할까봐

1473년에 숙의로 봉해진 파평윤씨인 정현왕후를 1480년11월에 성종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버지는 우의정 영원부원군 호다.
정현왕후는 진성대군(11대 중종;중종 반정)과 신숙공주를 낳았는데,공주는 일찍 죽었다.

 

폐비가 된지 3년 후 폐비 윤씨는 1482년 8월16일(양력8월29일) 사사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생졸;1455년7월15일(음력 윤6월1일)~1482년8월29일(음력8월16일)였다.

 

성종은 폐비 윤씨를 경기도 장단에 매장하였고

폐비 윤씨의 묘를 '윤씨지묘'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장지가 좋지않아 신하들의 건의로,

성종9년 1488년에 지금의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 의료원 자리로 이장 하였으며,

 

연산군이 즉위 한 후 

폐비 윤씨의 묘가 회묘에서 효사묘로 바꿨다가 다시 회릉으로 격상시켰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윤씨를 복위 시켜야 된다고 하여 유배를 갔거나 파직당한 대신들은 복위되었으나

윤씨 폐위에 앞장 섰거나 복위에 동참하지 않았던 대신들은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다.

대표적 인물로 한명회,한치형,윤필상 등이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폐비 윤씨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었으나  중종 반정 이후 삭탈되면서 죽을 당시의 폐서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 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로 이장하였으며,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다.

회묘 근처에는 후궁 묘역이 있으며, 그 중 윤씨의 묘소는 봉분이 크고 석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지명이 되어 오늘날의 서울 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왕비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서삼릉(西三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댱구 원당동에 있는 희릉,효릉,예릉의 세 능(三陵)이다.

 1970년5월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서삼릉은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인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 등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양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삼릉'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과 3기의 원과 1묘,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태실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166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라고 칭하였으나,

 1870(고종 7)에는 소경원으로 개호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 왕실의 태실,왕자묘,후궁묘,공·옹주묘가 현재의 위치로 집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명종 후궁 경빈 이씨의 묘 외 6기의 묘를 옮겨왔다.

  1944년에는 정조의 장남 문효 세자의 묘인 효창원이,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의 묘 의령원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씨의 회묘가 서삼릉으로 옮겨왔다.

  서삼릉 능역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덕수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가,

   2009년엔 귀인 장씨(의친왕의 모친)의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 경역으로 이장하여,

  서삼릉은 현재의 3릉 3원 1묘 및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태실 54기로 구성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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