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도정치               2019.08.05.월요일,맑음

조선시대 외척 세도 가문이 권력을 주도했던 정치형태로

어린 왕의 즉위와 그에 따른 왕권의 약화를 원인으로 본다.

 

조선의 제 22대 임금인 정조 때 권세를 휘둘렀던 최초로 홍국영으로부터 시작되어 순조 즉위 후 김조순

이래 안동 김씨,

1827년 세자가 정치를 대리한 이후 풍양 조씨,

철종 때는 안동 김씨 등 임금의 외척이 되는 집안이 세도 정치를 행했다.

1973년 고종의 왕위 계승을 계기로 흥선 대원군 정권이 등장하여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막을 내렸다.

세도정치의 본래 의미는 '세상 가운데의 도리'인 세도(世道)를 실현하는 정치로, 그러한 정치가 되기 위해서 세도의 책임자가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순조·헌종·철종 대에 실제로 전개되었던 정치형태를 칭할 때는 세도의 책임을 맡은 자가 세도를 빙자하여 세력을 휘둘렀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세도정치(勢道政治)라고 불렀다. 세도정치의 효시는 정조초에 정조의 신임으로 세도의 책임을 부여받은 홍국영(洪國榮)의 독단적인 정치운영이다.

순조 이후에는 안동김씨·풍양조씨 등 노론 출신의 외척 가문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여기에 남양홍씨·대구서씨·연안이씨·나주박씨 등 노론의 몇몇 유력가문이 참여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등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행해졌다. 이들 가문들은 당쟁을 통해 다른 당파, 다른 가문들을 정치적으로 도태시키면서 주도권을 확립했는데, 이는 곧 당쟁의 주요쟁점이었던 명분과 의리 다툼에서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오랜 당쟁의 과정에서 살아 남은 세도가문들은 그들 스스로가 내세운 명분과 의리를 세상 가운데의 올바른 도리로 정립하고 스스로를 그러한 의리의 실현자 곧 세도의 책임자로서 자임할 수 있었다. 이들은 관료적 기반, 산림으로서의 명망, 왕실의 외척으로서의 정치적 영향력 등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했다. 대표적인 예가 안동김씨 김조순(金祖淳) 집안이다. 김조순은 순조비의 아버지로서 순조가 친정하면서부터 정치권을 장악했다. 그는 노론의 중심인물들이었던 김수항·김창집 등 선대가 쌓아놓은 정치적 기반을 이어받았으며, 그 자신은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정조에게 신임을 받았다. 김조순의 뒤를 이어, 김좌근(金左根)·김병기(金炳冀) 등이 풍양조씨 조만영(趙萬永) 집안과 경쟁하면서 세도가문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비변사를 장악하여 고위 관직을 계속 독점했으며, 군영을 장악하여 군사력을 그들의 통제 안에 두었다. 국왕은 정치를 거의 이들에게 의존하고 독자적인 정치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세도정치가 행해졌던 19세기는 봉건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는 변동기로서 일반백성은 물론이고 양반들마저도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갔다. 따라서 농민들은 점차 격화되어가는 사회모순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1862년(철종 13)에는 삼남지방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이에 세도정권은 사회모순의 해결 없이는 정권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농민들의 요구사항의 하나였던 삼정(三政) 문제의 해결을 약속하고 사태를 수습했으나 그것마저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농민항쟁으로 조성된 정치적 위기 상황 속에서 1863년 고종의 왕위계승을 계기로 대원군 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세도정치는 막을 내렸다. 대원군 정권이나 민씨 정권의 정치형태를 세도정치에 포함시키기도 하나 정치제도, 정치세력의 존재 형태와 지향, 정치상황 등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져 세도정치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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