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문수동자            작성일자; 2011.04.06.수요일,맑음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 한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만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악몽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한다.

이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  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 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세조의 등을 밀어주는 모습으로 상원사 문수전 월랑에 그려진 벽화.

 

병을 고친 이듬해 봄,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상원사에 도착한 왕은 곧바로 법당으로 들어갔다.

막 예불을 올리는데 어디선가 별안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자꾸 앞으로 못 가게 잡아

당기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예감이 든 왕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병사들을 풀어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세 명의 자객이 세조를 시해하려고 시퍼런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그들을 끌어내 참하는 동안 고양이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마터면 죽을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해 세조는 강릉에서 가장 기름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다.

그리고는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이때 부터 절에는 묘답 또는 묘전이란 명칭이 생겼다.

즉 고양이 논, 또는 고양이 밭이란 뜻.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의 여러 사찰에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고,

왕명으로 전국에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최근까지도 봉은사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또 지금도 상원사에 가보면 마치 이 전설을 입증하는 듯 문수  동자상이 모셔진 청량선원 입구 계단의 좌우에는 돌로 조각한

고양이 석상이 서 있다.

속설에 의하면 '공양미'이란 말도 고양이를 위한 쌀이란 말이 변하여 생겼다는 일설도 있다.

고양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자신에게 영험을 베풀어준 도량을 중창하여 성지로서 그 뜻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서였다.

대중 스님들과 자리를 같이한 왕은 상원사 중수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이 올렸다.

소탈한 세조는 스님들과 둘러앉아 공양 채비를 했다.

'마마, 자리를 옮기시지요.'

'아니오. 대중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는 것이 과언은 오히려 흡족하오.'

그때 맨 말석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승이 발우를 들더니, 세조의 면 전을 향해 불쑥 말을 던졌다.

'이거사, 공양하시오.'

놀란 대중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가. 정작 놀라야 할 세조는 껄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도인될 그릇이로다.'

왕은 그 사미승에게 3품의 직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표시로서 친히 전홍대(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아마 세조는 지난날 자신의 병을 고쳐준 문수 동자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그 후 세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귀하게 되라는 징표로 붉은 허리를 졸라매 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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