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수맥 피해        작성일자; 2010.04.15.목요일,맑음

 

산소가 수맥의 영향을 받아 관 안에 물이 차 있으면 시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으며

이와 관련된 후손들은 가난.자살.이혼.자식들이 적령기에 혼인 못함.가출.난치병 등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목격하고 있다.

이라는 썩지 않은 시신으로 그것이 바짝 말라 있던 물에 불어 있든 마찬 가지이며 후손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특히 조상의 산소가 수맥의 영향을 받으면 족(足) 빠지게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다.

그리고 수맥의 측정은 현대에서는 엘로드(기구가 영어의 L자 모양으로 생겼다)나 팬들륨(추)로 측정 하고 있으며

수맥 피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 한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은

낮에는 신하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사에 힘써 한글창제와 측우기 등을 만들어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밤에는 건강한 체력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房事(방사)에 열중하여 6명의 왕비와 후궁들로 부터 22명의 왕자와 공주를

생산하여 왕손을 번성 시켰으니 누가 세종임금을 성군이라 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가 조선시대 역사를 보면 방사에만 집중한 “등대(燈臺)”같은 연산군이 폐위 되 듯

어느 한쪽만 추구하면 성군이라는 칭호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 등대는 선박들의 항해를 도와주기 위해 야간에 불을 밝히는 것인데

     요즈음은 여자를 밝히는 사람을 일컬어 등대라고 한다

 

―세종대왕의 강한 효심

세종대왕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승하하기 직전 상지관(궁중지관)과 대신들이 세종에게

아뢰고 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의 묏자리를 어디로 정했으면 좋겠사옵니까?”

“아버지 태종(이방원)이 묻혀 있는 헌인릉(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밑에다 장례를 지내라

그러면  죽어서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겠노라”

“전하 그곳은 부왕이신 태종께서 이미 명당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아래쪽은 물구덩이여서 아니 되옵니다

 다른 곳을 천거 하시옵소서”

“아니다 다른 곳이 아무리 좋다 한 들 내 아버지 밑보다야 더 좋은 데가 있으랴 !”

“그리고 임금인 짐이 불경스럽게 역장(조상보다 위쪽으로 올라가서 쓰는 산소)을 하란 말이냐?

경들은 나의 유언을 소홀히 하지 말고 부왕의 아래로 장지를 정하도록 하라”

상지관과 대신들이 극구 만류 했으나 세종의 고집이 완강하여 할 수 없이 수맥이 흐르는 곳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로서 왕실은 참혹하리만치 처참한 비극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세종이 붕어하자 큰아들 문종이 대를 이어 즉위 했으나 2년 만에 종기로 병사,

- 문종의 아들인 단종은 3년 만에 숙부인 세조에게 에게 왕위를 빼앗기면서 사약을 받아 비명횡사,

- 조카에게 왕권을 빼앗아 천년만년 부귀를 누릴 것 같았던 세조도 얼굴과 몸에 부스럼이 나는 병에 걸려 살이 문드러지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13년 만에 병사하고

-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는 20세에 이유모를 가위 눌림에 즉위도 못하고 죽음을 당했으며

- 둘째 아들 예종은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1년 만에 그 또한 병사하니 도합 1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세종대왕의 묘가 수맥에 들어가서 계속 흉한 일이 일어나니 이장을 해야 한다는

강력한 여론이 형성되어 상지관(궁중지관) 안효례의 주도로 예종 1년(이장 후 병사함)에 이장을 할려고

광중(시신을 묻은 구덩이)을 파니 관에는 물이 가득 차 있고 시신은 물론 수의 하나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주로 이장한 세종대왕의 영릉은 회룡고조형(용이 머리를 돌려 할아버지 용을 바라보는 형,

또는 비룡승천형.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으로서 능 뒤에서 들어오는 용맥(산맥)은 거대한 용이 꿈틀 거리며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승천 할 듯 기세 왕성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며 능 앞으로 전개되는

좌청룡 우백호의 경치도 장관을 이룬다.

가깝고 멀리 있는 모든 산들은 하나도 배신한 것이 없이 영릉을 향해 공손하게 절하는 모습이여서

조선 왕조는 세종대왕의 영릉 발복으로 100년은 더 연장 됐다고 하며 왕릉 중에 제일로 치는 명당중의 명당이다

 

※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 중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 이성계의 동구릉과 태종의 헌릉을

    답산(踏山)하지 아니하면 풍수가가 아니다 할 정도로 유명한 명당이다

 

세종대왕의 시신이 여주 영릉으로 이장한 후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인 성종 임금이 보위에 올라 25년간 재위 하면서 새로운 정치기구로 내사성과 문하성

그리고 어사도성(御事都省)을 두어 삼성 체제를 완성하고 홍문관, 존경각, 독서당을 창설해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는 등

훌륭한 치적을 남긴 반면,

그 당시 당대의 여인으로 회자되었던 어우동을 궁으로 불러들여 연희를 즐겼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야사가 전해오고

또 폐비 윤씨와의 대립 등 여난도 있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서

집안에 줄초상이 나거나 계속 흉한 일만 일어날 때 “우리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상의 산소가 수맥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산소에는 쑥만 자란다.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가문이다”라고 하는 것도 조상의 묘를 명당에 두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뼈가 그대로

남아있어 후손이 조상의 음덕을 받아 부귀를 누린다는 뜻이며,

반대로 타인을 욕할 때“뼈도 못 추린다”는 것은 수맥파의 영향을 받아 뼈가 녹아 없어져 후손이 이장할 때 뼈가 없어

후손이 불행해 진다는 것을 뜻 한다 .

또, 4대(부모.조부.증조부.고조부) 봉사(奉祀) 제사를 지내는 것은

땅속에 매장된 조상의 뼈는 120년(1대가 30년으로 계산)이 지나면 더 이상 자손에게 음덕을 주지 못한다 하여

고조부 이상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등 모두 풍수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울러 돌아가신 조부나 부모님이 꿈에 나타나 물과 관계된 것을 암시하면 이장을 해달라는 뜻 이다.

 

 

 

 

-봉분

봉분에 잔디를 심었는데 잘 자라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다

봉분에 물풀이나 이끼가 낀다든가 쑥이 많이 자라고 있다.

봉분에 금이 가거나 갈라지거나 함몰 된다

봉분에 구멍이 뚫렸거나 개미집이 많다

이상의 4가지만 관심 있게 살피면 길지와 흉지의 감별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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