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현세자       2019.0101.화요일,맑음

생졸; 1612-1645.34세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에서 1612년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이름은 왕이다.

1625년 인조3년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1627년 병자호란때 전주로 내려가 남도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이해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때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이 후  9년동안 인질로 머무르면서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아내기도 하였다.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소현세자와 해결하려고 했고,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오게 되자 인조와 조정은 친청행위로 규정하고 좋화하지 않았고,인조가 총애하는 귀인 조씨(조소영)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부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 시켰다.

1945년 9년동안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한 후 2달 뒤인 4월23일 병으로 드러눕고 3일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 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두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명 다 병에 걸려 죽었다.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용 조씨는 소현세자빈 강씨와 불화가 심했는데,이로인해 인조가 장자인 소현세자를 감시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후 1637년 인조 15년,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관계를 유지하자 소용조씨는 세자가 왕위를 차지할 목적이라며 갖은 모함으로 인조를 부추겼다.

결국 1645년 인조 23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환국 한 후 두달만에 소현세자는 돌연사하고 만다.

당시 주치의 이형익은 소용 조씨의 어머니 한옥의 집에 드나들던 자로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자였다.

독살의 흔적이 뚜렸하였으나 인조는 서둘러 장례를 마첬고,이형익에 대한 처벌도 하지 않았다.

또한 인조는 적자 계승자인 소현세자의 원손이 아닌 차자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자 책봉 직후인 1645년 인조 23년 10월 소용 조씨는 소의에 올랐고,

계비인 장렬 왕후 조씨를 이간질하여 별궁인 경덕궁으로 몰아 내는데 일조하였다.

소현 세자빈 강씨가 자기를 저주 했다는 소의 조씨는

1646년 인조 24년,세자빈 강씨가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게 되어

별당에 유치 됐던 강씨는 폐서인으로 사약을 받았고,왕손 3형제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첫째,둘째는 병사하고 세번째인 임창군 이혼만 살아 남았다.

후일 영조때  임창군의 아들 6형제 중 장남인 밀풍군은 이인좌의 난 때 연좌되어 좌결하게 된다.

경기도 고양시 소현묘에 묻쳤다가 고종 때 서야 소역원으로 격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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