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암 송시열        2019.07.14.일요일,맑음

송시열;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부; 송갑조

모; 봉사 곽자방의 딸 선산 곽씨

처;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고,12세 때 아버지로 부터 주자,이이,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연산의 김장생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25년(인조3),19세때 한산 이씨와 혼인하여 26세(1632)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뒤에 회덕의 송촌,비래동,소제 등지로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송시열은 장령 등의 관직으로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는 정치적 소신을 진술한 것인데,

화친 명나라로 이적 청나라를 밝힘으로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

되는 계기가 되었다.

1650년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 일파가 물러났다.

1655년(효종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8년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5월, 효종이 급서한 뒤,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국구 김우명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송시열은 현종 15년 간 거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1668년(현종9) 우의정에,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이다.


재야에 은거한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으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삭출되었다.


1675년(숙종1)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중에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8)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 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 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1월(숙종),숙의 장씨(장희빈)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 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다

이 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 서원만 37개소였다.

영조,정조대에 노론의 집권하에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송시열은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 전례 문제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때문에 예학적 견해 차이로 인한 예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죽자,계모인 자의대비 상복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기년(朞年: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때 윤휴는 '의례' 상복편의 소설인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의 소설에 “서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는 예외 규정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자의 칭호이기도 하고,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 등 대신들은 '의례'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 기년설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660년 3월 허목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윤선도는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

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어 서인들은 송시열의 설에 따라
대공복(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 유생 도신징의 상소로 다시 기년복으로 번복되었다.

그 결과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과 다르지 않다.”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대 북벌론의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제로 효종과 비밀 대담을 가지기도 했고,

왕과 비밀 서찰을 교환하기도 하였다.그러나 그들의 북벌 계획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효종과의 비밀 대담이나 서신 왕래에서 송시열이 건의한 것은 극히 이념적이고 원론적인 것이었으며,

실제적 대책은 아니었다.

북벌론은 1659년 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당시 형편으로는 즉각적인 북벌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직업군인)을 줄이고 민병(농민군)을 활용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의 실제 준비보다 그것이 내포한 이념성을 강조하였다.

명나라를 향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의 복수설치 문제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그것이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춘추대의의 관념에서 나온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강력한 이념이 국내 정치에서 부패와 부정을 억제하고 기강의 확립과 행정의 효율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 이념은 송시열 자신과 그 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효종의 죽음과 함께 침묵되었다가 숙종 초기에 다시 제창되었는데,

효종대에 송시열의 북벌론은 그 이념성과 함께 부국안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숙종대에 국가의 전례 문제와 결부되어 다시 제창된 존주론에는 오직 당쟁에서 대의명분을 장악하기 위한 이념성만이 강조되었다.

 

송시열은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났다.

문장은 한유.구양수의 문체에 정자.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웅장,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영릉지문(효종릉의 지문)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 수학한 송준길.이유태.유계.김경여.윤선거.윤문거.김익희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으로 불렸다. 한때는 남인 권시.윤휴 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의 손자들인 김수증.김수흥.김수항 형제들.민정중.민유중 형제.이후원.이시백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하였다.

소론계인 남구만.박세채.이경석과도 친했으나 뒤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


송시열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경석.윤휴 및 윤선거.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기고,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도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 분당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 외에 김창협.이단하.이희조.정호.이선.최신.송상민 등이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진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윤봉구.황이간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송시열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경례의의''심경석의''찬정소학언해''주문초선''계녀서'등이 있다.

문집은 1717년(숙종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이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보완하여 평양 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이라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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