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간회              2019.10.31.목요일,맑음

1927년2월 '민족 유일당 민족 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 운동 단체이다.


안재홍·이상재·백관수·신채호·신석우·유억겸·권동진 등 34명이 발기했다.

정강정책

1. 조선 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

2.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3. 모든 기회 주의 부인 등이었다.


초대 정·부회장에 이상재와 권동진이 각각 추대되었으며,

35명의 간사와 하부 조직으로 총무·재무·출판·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 등 7개 부서를 두었다.

그러나 주요 직책을 민족 주의 진영에서 주도하여 사회 주의 진영의 불만을 샀다.

내부적으로 좌.우익의 갈등은 있었지만, 신간회는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형평 운동 지원,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아 전국에 지회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일본에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의 '고등경찰요사'는 '배일선인'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이들이 집회 등에서

하는 언동으로 보아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당시 신간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신간회의 세력이 이렇게 성장하자, 일제의 탄압이 거세져서 대규모 집회를 열 수 없었다.

1929년 11월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 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독립 운동을 지향한 민중 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조병옥·이관용·이원혁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사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만든 단체였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데 대해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이 높았다.

이들은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된 사이를 이용하여 해산 운동을 벌였으며,

1931년5월,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를 결의함으로써

발족한 지 4년만에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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