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미양요    2019.08.15.수요일,흐림

신미양요는 1871.6.1-6월11일 까지 12일간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5년 후 빌미로 미국이

강화도 일대에서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의 전쟁이다.

조선과 미국은 1855(철종6년),1865(고종2년),1866년에 3차에 걸처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 연해,선천군에 표류하여 접촉 하였는데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1866년7월,평양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력에 의한 강제 통상을 계획했으며 청국에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다.

 

또한 1866년에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던 프랑스에게 공동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의했으나,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전야에 있었으므로 거절했다.


1867년 미국은 슈펠트 중령으로 하여금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의 황해도 연안을 수색했으며,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에 대해 손해 보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배회하며 지방관과 회담하다가 성과 없이 돌아갔다.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은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 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71년 조선측과의 교섭 책임을 주청 특명 전권공사 F. F.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에게 조선 원정을 지시했다.

로와 로저스는 상하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대포 85문,병력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1871년4월3일, 미국 함대는  경기도 남양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량하면서

1871년4월8일에는 물류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는 남양 부사로부터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을 진무중군으로,이창회를 강화 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서울의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1871년4월14일,조선 정부에서 한학역관을 파견하자 미국의 로는 미관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고관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덕진진,초지진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결과 미국측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1871년4월15일,대원군은 진무사 정기원을 시켜 미국의 불법 침략을 문책하고 통상 조약 교섭을 거절하게

   했다.로는 무단 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4일 내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 행동을 취할 것이라

   협박했다.

1871년4월23일,로저스는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 했으며

1871년4월24일,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수륙 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미국 함대도 퇴각할 것이라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 도회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 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 들여졌다.이에 미국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조선 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 행동을 감행

   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 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대규모 군사 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1871년5월15일,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 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 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 되었을 경우에는 구조해달라고 요청한 후,

1871년5월16일,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 충천했고 배외 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흥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세력과의 수교를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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