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민회                   2019.09.19.목요일,맑음

신민회는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이다.

1907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보안법·신문지법 등 반일적 색채를 띤 계몽 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사회 계몽 운동가들이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안창호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1896년도에 결성되어 2년 동안 활동하다 와해된

독립 협회의 청년 회원들이었다.

중심 인물로는 회장 윤치호,부회장 안창호,유학자 출신의 장지연·신채호·박은식,청년 장교 출신의 이동휘·

이갑,평양 지방의 자산가인 이종호·이승훈, 그리고 안태국·이동녕·이회영 등 이었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를 공화 정체로 한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인 입헌 군주제를 탈피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다.

또한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실력의 양성을 위해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

신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자신을 위한 신사상,신윤리,신학술,신모범,신개혁을

주창했다.


비밀결사인 만큼 엄격한 심사를 거쳐 회원을 받아들였으며,

조직은 총본부 산하에 감독부(1도에1개소),총감소(5군 이상을 합함),군감소(1군에 1개소),반()의 종적인 형태로 구성했으며, 당사자 2명 이상은 서로 알지 못하게 했다.

회원은 전국에 걸쳐 800여 명에 이르렀는데,서북 지방의 그리스도교 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신흥 시민층과 신지식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폭넓은 활동을 전개했다.

1. 교육구국운동: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는 수십 개에서 1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대성학교는 완전한 시설을 갖춘 중학교였으며,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둔 보창 학교는 강화군에만 21개 소학교 분교를 열었으며,

    북부와 중부 각 지역에도 보창학교가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학교설립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2. 계몽 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 운동:

    계몽 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국권 회복, 민권 사상,구습 타파,

    자발적 의무 교육 실시 민족 단합의식 등을 고취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 11월에 창간한 잡지 '소년' 역시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출판물 보급과 사업연락을 위해서는 평양·서울·대구에 각각 태극서관을 두고 합법적인 활동을

     했으며, 민족 문화와 국사학에 관심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조선 광문회는 외곽 단체로서

     출판 사업을 이끌었다.

3. 민족 산업 진흥운 동:

     민족 산업 자본의 발흥을 위한 실업장 려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일환으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 제조 주식회사를 세운 것을 비롯하여 협성동사·상무동사·조선실업회사

     등의 회사를 세웠으며, 사리원의 모범 농촌 등을 주도했다.

     이 사업은 신민회 재원의 확보에 도움을 주었지만,

     취약한 자본으로 인해 일제의 대자본에 밀려 큰 성과를 낼 수 없었다.

4. 독립군 양성 운동:

     국권 회복을 위하여 의병 운동을 지원했으며, 의병 운동의 현대화를 위해 국외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여 독립 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이 계획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1910년

     가을에 만주 일대에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1년 봄에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에 신한민촌을 건설해 단체

     이주를 시작했으며,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했다.

     신흥 무관 학교는 4년제 본과 외에 3개월·6개월의 속성 과정을 두어 애국 청년과 의병들에게 현대적

     군사 교육을 실시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한일 합병을 마무리 지으려고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일제의 감시 대상이던 안창호를 비롯한 이갑·이동휘·신채호·조성환 등은 1909년에 이미 미국과 러시아령

연해주,서북간도 등지로 망명했으며,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와 회원 일부가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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