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탁 통치 반대 운동          2019.11.15.일요일,맑음 

1945년12월27일, 모스크바 협정에서 채택된 신탁 통치안을 반대하던 거족적인 대중운동이다.

1945년8월15일, 광복 후 남·북한을 미·소 양군이 점령함으로써 통일 정부의 수립이 요원하게 되자

1945년12월27일, 모스코바 협정에서 '한국에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일정 기간의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한다'라고 하였다.이를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가 곧 서울에서 열린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고 즉시

   독립 정부의 수립을 갈망해온 전국민은 이에 분노했다.

1945년12월30일, '반탁 전국 대회'를 열고 애국 사회 단체와 정당의 이름으로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12월31일,권동진을 위원장,안재호,김준연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회'를

   조직하고 반탁 시위 대회를 전개하였다.

신탁통치에 대한 반응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 민주당'의 주도로 광범한 반탁 운동이 전개되었고,

공산주의자들도 반탁의 뜻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삼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은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공산 주의자들은 찬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46년1월2일,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 단체 연명의 모스크바 결정 지지 공동성명서,

1946년1월3일에는 북조선 행정 국장회의 성명서 등이 잇달았는데,

   이 성명서들은 한결같이 임시정부 수립의 의의를 강조하고 신탁 통치는 ‘후견제’라고 역설하였다.

1946년1월4일, 박헌영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좌익 진영은 신탁 통치를 찬성하고 나섰으며,

   신탁 통치 문제는 ‘민주 주의적 민족 통일 전선’의 결성을 통해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반탁 운동은 금지되고 조만식은 연금되기에 이르렀다.

   소련은 그들의 점령지역 안의 모든 반탁 세력을 거세하여 북한의 정당과 사회 단체들을 모스크바 협정

   지지로 통일시키고 남한의 좌익 진영도 찬탁하게 하여 미 ·소 공동위원회에 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좌익 계열의 찬탁을 분쇄하기 위해 민족 진영 단체들이 단결하여 반탁 운동을 전개,

   시위,집회,언론 등을 통해 미.소 공동 위원회에 항의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대한 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다.


미 ·소 공동 위원회가 격렬한 반탁 운동과 미 ·소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고,

이를 계기로 우익 민족 진영은 다시 '민족 통일총 본부'를 창설하여 독립쟁취의 기틀을 잡으려 하였다.

1947년1월,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44대1로 반탁을 결의하고,

1947년1월24일, 경교장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정당,사회 단체 대표들이 모여 '반탁 독립투쟁위원회'를 결성

   하였으며,

1947년6월1일에는 이승만,김구가 반탁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미 ·소 공동위원회에 통고하였다.

이리하여 1947년6월23일, 단오절을 계기로 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된 반탁 운동은

1947년8월 말, 미.소 공동 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될 때까지 극렬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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