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환지                25019.08.05.월요일,맑음

심환지;

생졸; 1730년(영조6년)-1802년(순조2년)

본관; 청송

증조부; 심속

조부; 교리 심태현

부;  심진

모; 부사 김이복의 딸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주로 삼사의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준엄하고 격렬한 언론을 펴서, 의리·공의를 강조하여 몇 차례의 유배 생활을 겪었다.

1793년(정조 17) 이후 이조참판·규장각제학을 거쳐서 이조·병조·형조의 판서에 임명되었다.

김종수·윤시동과 정치적 동지로서 신임의리의 고수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위배되는 남인 계열의 채제공·이가환·이승훈의 징토에 앞장서서 이단 배척을 역률로 할 것을 주장했고, 소론계의 서명선도 공격했으므로 이른바 벽파 선봉으로 인정되었다.

윤시동이 죽은 뒤 1798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일파의 영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는 성행하던 금광의 채굴을 금지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800년(순조 즉위) 순조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영의정에 올랐다. 원상(왕이 병이 나서 정무를 보기 어렵거나 어린 왕이 즉위할 때 왕을 보좌하던 원로대신)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세도를 진정시킬 것을 자임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동벌이(黨同伐異: 당적이 같으면 동지로 받들고 다르면 물리침)에 주력하여 반대파 인물들을 크게 살육했으니, 이 사건이 곧 신유사옥이다.

심환지는 정조가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사용했던 장용영을 혁파하였다.

그리고 김구주와의 절친했던 관계를 생각하여 김관주·정일환을 등용하고, 김관주·정일환의 사적인 원한이 정국에 개제되게 했다. 또, 권유를 대사헌으로 임명하여, 정조의 처지를 지지하던 김조순에 대한 공격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죽은 뒤에 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육한 죄와, 순원왕후의 대혼을 방해했다는 비판을 받아 관작이 삭탈되었다. 철저한 노론계 당인으로서 치적은 볼만한 것이 없으나, 다만 죽을 때까지 검소한 생활을 하여 칭찬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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