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과 이범진        작성일자; 2019.08.19.목요일,맑음

 

1894년 조선은 갑오개혁이 일어 나자 청에 원군을 요청했고,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톈진 조약(1858년 제2차 아편전쟁)을 근거로 조선에 침입했다.

갑오 농민 전쟁이 진정된 후 청,일 양군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으며 7월 25일 청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평양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청군은 후퇴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 내정에 적극 간섭했으며 이에 농민 봉기가 일어 났으나 우금치에서 일본에게 패했다.

황해 해전에서 청군을 격파한 일본군은 진저우성과 뤼순을 점령했다.

청은 전쟁에 참패했고 1895년4월17일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자본 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반면,

조선과 중국은 일본 및 열강의 수탈 대상 및 분할 경쟁의 대상국이 되었다.

 

청일 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민비 세력에게 친러 정책을 권유했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5년8월20일 을미사변(민비 살해사건)을 일으켰으며,

일본의 민비 학살과 단발령은 반일 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민비가 시해된 후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에게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1896년2월11일 새벽,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제 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遼東]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18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조선 내에도 친러세력을 부식하려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아 조선의 왕실 및 일부 정치세력 내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

동안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민비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러시아 공사 K. 베베르[韋貝]는 미국공사와 함께 민비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다.

그리고 친일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의 실시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민비학살과 단발령은 조선민들의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민비가 경복궁에서 학살되고 난 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1895년 10월 12일 '춘생문사건'은 친러세력이었던 이범진 등이

춘생문으로 입궐하여 고종을 데려오려는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또다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당시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모의하여 고종에게 접근,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고종은 마침내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으로 개화내각의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참형되었고,

내부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망가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은신중이던 친미·친러파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어 내각을 구성했다.

친러내각은 친일내각이 실시한 갑오·을미 개혁사업을 중단하고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되어 한동안 약화되었던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 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의 세력다툼의 결과였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이범진       

러시아를 도와 아관파천 일으켜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러내각을 조직했다.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권총으로 자결했다.

187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887년 협판내무부사가 되었다.

일본세력의 침투에 맞서 미국 및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5년 10월 친일정권을 타도하여 새 정권을 세우려던 춘생문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 비밀리에 귀국, 러시아 공사 베베르 및 이완용 등과 함께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친러내각이 들어서자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1897년 주미공사가 되고,

1900년 주러공사로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일제가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고

황제의 밀사 명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국권회복에 힘썼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삼(聖三). 아버지는 경하이고, 범윤(範允)의 형이다.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가 되었다.

일본세력의 침투에 맞서 미국 및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민비가 친러정책을 표방하게 되자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

1895년 7월 궁내부대신서리가 되었으나 8월 20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파면되었다.

그해 10월 친일정권에 포위되어 있던 고종을 궁궐 밖으로 피신시키고

친일정권을 타도하여 새 정권을 세우려던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러시아 공사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 비밀리에 귀국, 러시아 공사 베베르 및 이완용 등과 함께

2월 11일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유길준 등의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1897년 주미공사가 되고, 1900년 주러공사로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일제가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고 황제의 밀사 명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국권회복에 힘썼다.

1907년 6월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상설·이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만나 회의에 보내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번역했다.

이때 아들 위종도 밀사의 일원이자 통역관으로 함께 헤이그로 떠났다.

1909년 11월에 있을 만국평화회의에서 다시 활동하기 위해 2번째의 평화회의 밀사파견 운동을 계획하여 중심연락을 맡았다.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권총으로 자결했다.

유언에 따라 그가 교민자제 교육을 위해 기증한 1,000루블은 한민학교를 설립할 때 사용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갑오개혁(갑오경장)                 작성일자; 2019.09.12.목요일,맑음

 

1894년부터 1896년까지 개화파에 의해 추진되었던 근대적 개혁 운동을 '갑오개혁','갑오경장'이라 한다.

1894년1월,갑오 농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이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1884년의 톈진(천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청,일 양군이 주둔한 가운데 양국간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 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했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서 조선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민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조선 정부가 이를 내정 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자 일본군은

1894년7월23일에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 일가를 타도하고 흥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하는 한편,

김홍집 등 개화파 인사들로 신내각을 구성하게 하였다.

이어 1894년7월27일에는 내정 개혁 추진 기구로 군국기무처가 설치 되었고,

총재 김홍집을 비롯한 박정양.김윤식,유길준 등

주로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된 17명의 의원이 참여하여 개혁 사업을 총괄 지휘하였다.

 

군국기무처가 설치 되면서 진행된 개혁 사업은 

제1차 개혁에서는 7월27일부터12월17일까지 개혁안을 제정하는 형태로 진행 되었다.

개혁 기간 동안에 일본은 청일 전쟁을 치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 과정에 집중적으로 개입 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 개혁에는 갑신 정변 이래 개화파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개혁 구상이 비교적 충실히   반영 되었다.

갑오 농민 전쟁에서 농민군이 제기한 요구도 부분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압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개화파 자신이 친일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혁도 상당 부분 존재했다.

정치제도의 개혁을 보면,

7월30일의 의정부 관제안과 8월22일의 궁내부 관제안에 따라 정부와 왕실이 제도적으로 분리 되었고,

의정부 관제안에 따라 국왕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유명무실화 되었던 의정부가 정치의 중추 기구로 자리 잡았다.

조선 초기부터 사무분장 기구였던 6조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의 8아문으로 개편 되었으며,

관료 선발 장치로서의 과거제가 폐지되는 대신에

총리 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이 부여 되었고,

18등급의 품계를 12등급으로 축소하여 칙임관·주임관·판임관으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청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의 사용을 의무화하여 청국과의 사대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과거의 봉건적 정치 제도를 근대적인 것으로 일신시켰을 뿐 아니라,

군국기무처를 장악한 개화파로 하여금 국왕의 간섭에 구애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혁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사회 개혁의 측면에서는 문벌 제도와 반상 차별 등의

신분제 철폐, 죄인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들 조처는 갑오 농민 전쟁에서 제기된 요구와 대부분 일치되는 것들 이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봉건적 관습이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경제 부문의 개혁은 재정 개혁과 화폐 개혁 중심 이었다.

재정 부문에서는 그동안 각 궁방과 관청에서 자체 경비를 조달하던 방식을 지양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탁지아문에서 전관 하도록 하였으며, 조세의 금납화를 의결하였다.

화폐 제도면에서는 12월에 신식 화폐 장정을 제정하여 은본위제를 채택하였으며,

일본 화폐의 조선내 통용권을 허용하였다.

 

제2차 개혁은 홍범14조 발표를 주도했으며,

1894년12월17일,

청일 전쟁의 승리를 눈 앞에 둔 일본이 대원군을 퇴위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는 한편,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면서 시작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고,

농민군이 패배함에 따라 사회 개혁의 추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문에 개혁 과정에서 개화파의 주도성은 거의 상실되었다.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은 고종으로 하여금

청국과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 단절, 종친과 척족의 정치 관여 금지, 정부 각 기관의 사무 분장, 재정 제도의 정비 등을

주 내용으로 한 홍범14조를 발표하게 하였다.

이 홍범14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새 내각은 개혁안을 제정, 실시하였다.

먼저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을 내각과 부로 변경하고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 7부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궁내부 관제는 대폭 축소되었다.

지방 제도도 크게 변경 되었는데,

종래의 도·부·목·군·현 등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여 23부 337군으로 개편하였다.

재정 제도에서는 전국에 9개 소의 관세사와 220개 소의 징세서를 설치하여 조세사무를 전관하도록 하였다.

군부 관제·훈련대 사관 양성소 관제·경무청 관제 등을 제정하여 근대적인 군사·경찰 제도를 확립하였고,

재판소 구성법·법관 양성소 규정 등을 제정하여 사법제도의 근대화를 기하였다.

 

그러나 제2차 개혁은 개혁 방향에 불만을 품은 일본측과 고종, 왕비 민씨(명성황후) 등의 공격에 의해

박영효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함에 따라 끝나고 말았다.

 

제3차 개혁에서는 단발령과 건양 현호를 사용하고 군제 개편을 시행했으나 국왕의 아관파전이 단행되고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면서 좌절 되었다.

박영효가 망명한 이후 다시 김홍집이 내각 수반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1895년8월24일부터 1896년2월2일까지 추진된 제3차 개혁이다.

 

박영효를 몰아낸 민씨 세력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 내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3차 김홍집 내각 발족 초기 일본의 영향력은 상당히 퇴색 하였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왕비 민씨(명성황후)를 시해 한 후,

개혁은 오로지 일본의 뜻대로만 진행 되다시피 하였다.

이 시기에도 연호의 제정, 태양력의 채택, 소학교령의 발포 등 총 140여 건의 개혁안이 심의·의결 되었다.

그러나 이때 공포된 단발령은 전국 각지에서 보수적인 유생들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홍집 내각의 친일적 성격에 대한 민중의 불만에 불을 붙여

급기야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을 비롯한 내각 요인들이 살해당하는 상황을 빚어 내게 되었다.

홍집 내각이 붕괴 됨에 따라 2년 가까이 지속된 갑오 개혁은 끝을 맺었다.

 

갑오개혁은 19세기 이래 조선 봉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개혁의 흐름이면서도,

청일 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 형성된 일본 중심의 근대적 제국주의 질서 속에

조선이 편입된 과정을 법제화한 양면성을 띤 개혁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대내적으로 반봉건 근대화의 이념에 의한 부국 강병의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대외적으로 반침략 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예속적 개혁 운동으로,

일제 식민지화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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