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녀 정난정(鄭蘭貞)      2015.01.11.토요일,맑음

조선 왕조에서 왕과 왕비를 등에 업고 국정을 좌지우지 했던 3대 악녀는 장녹수와 정난정,김개시(김상궁)

장희빈(장옥정)을 들수 있다.장녹수와 정난정,김개시(김상궁)는 노비출신이며,희빈 장옥정만이 유일한

중인 신분에서 국모,왕비까지오른 인물이며 조선왕 제20대 경종의 모후다.

왕비로써 권력을 휘두른 조선의 왕비로는 희빈 장씨.문정황후(중종),정순왕후다. 

조선 명종 때의 천민인 정난정은 타고난 미모와 재기를 발휘하여 정경부인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철의 여인 문정왕후 윤씨(중종의비,명종의 모)를 보필하고 보우대사를 막후지원 하면서 불교 중흥과 신분 타파를 시도하여 유교 사회에 일대 변혁을 꾀하였다.

정난정에게 분개한 사관들은 그녀를 희대의 요녀이자 탕녀로 매도했다.천첩에 불과한 그녀가 남편 윤원형의 권세에 기대어 본부인을 독살하고 정실의 자리를 차지했으며,을사사화 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죄목까지 뒤집어 씌웠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란 말은 희생양으로 삼았던 한 여인의 삶을 재평가하고 있다.

정난정은 합천 출신의 무관 정윤겸과 소실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윤겸은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국공신 3등에 군기시첨정이 되었으며, 1519년에는 회령 부사로 복무했다.

1522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재임할 때 해적을 소탕하여 임금에게 은을 하사받았고,

1526년에는 훈련원 도정 신분으로 성절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오위도총부에 속한 정2품 무관인

부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군영에 소속된 관비 출신이었으므로 얼녀였던 정난정은 종모법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천민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고관이었으므로 신역을 치르면 평민처럼 살아갈 수 있었지만 하시라도 상황이 바뀌어 나라에서 부르면 여종으로서 걸레를 들거나 물동이를 이어야 할 처지였다.

 게다가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그들 역시 천민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반정으로 연산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출범한 중종 시대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권력 투쟁이 격렬하게 펼쳐졌다. 재위 초기부터 반정 공신들의 탐욕으로 왕권이 실추되고 국정이 난맥상을 드러냈지만 입지가 미약했던 중종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반정공신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자 중종은 사림파의 거두 조광조를 조정에 불러들였다. 그로 인해 일시적으로 사림이 약진했지만 곧 교과서 같은 도학정치에 염증을 느낀 임금의 변심과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기묘사화라는 역풍을 맞았다.

1510년(중종 5년), 남녘에서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이 이어지면서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되었고, 북방에서도 야인들의 내습으로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등 변방의 정세가 흉흉해졌다. 이때 사망한 만포첨사 심사손은 정윤겸의 부하장수였다. 이에 경각심을 품은 조정에서는 외침에 대비한 임시합좌회의 기관으로 비변사를 설치했다.

바로 그 무렵 문정왕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중종의 조강지처는 중종반정 때 참살당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신씨였는데 반정 이후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출되면서 후궁이었던 영돈령부사 윤여필의 딸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장경왕후 윤씨는 1515년 인종을 낳고 나서 6일 만에 숨을 거두자 파평 윤씨 윤지임의 딸이 1517년(중종 12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바로 그녀가 문정왕후 윤씨이다.

1521년(중종 16년) 송사련의 신사무옥으로 사림파가 연타석 치명타를 맞았다. 그와 함께 중종의 맏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가 권세를 얻자 심정과 남곤이 그를 견제했다. 이들의 이전투구가 극에 달했던 중종 치세 중반 문정왕후의 척족인 윤임, 윤원형, 윤원로 등이 출사하면서 훈신과 척신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이들의 승부는 윤씨 일가의 압승으로 귀결되었고 그 여파로 사림의 일부가 조정에 복귀했다.

그 무렵 정난정과 윤형원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문정왕후의 수태 불공을 드리려 봉은사에 갔던 윤원형이

보우대사의 소개로 그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정난정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린 윤원형은 아버지 정윤겸에게 그녀를 소실로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들은 정난정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이미 정실이 있었던 윤원형은 정난정의 당찬 태도에 매우 곤혹스러웠지만 이미 내친걸음이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서약서를 써 주고 말았다. 당시 정난정은 윤원형이 유교의 근본주의에 물들지 않고 양반사대부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불교를 신봉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그의 불심은 독실한 불교도였던 누이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정난정은 그리하여 원치 않던 소실이 되었지만 집안에서 당당하게 행동했다. 전통적인 반가의 여주인답게 질서를 잡으려 했던 본처 김씨는 이런 그녀에게 기가 죽었다. 김씨로서는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한 것이 커다란 약점이었다. 억울한 심정으로 남편에게 소실의 건방진 행태를 고발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남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인종이 즉위한 뒤 윤임이 이끄는 대윤이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기용하는 등 기세를 떨쳤지만 명종이 즉위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수렴청정을 맡은 문정대비 윤씨가 자신의 정책에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사림에 철퇴를 휘둘렀던 것이다.

당시 소윤의 대표자였던 윤원형은 중종 사후 윤임이 중종의 여덟 째 아들 봉성군 이완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으며, 인종이 죽었을 때는 성종의 셋째아들 계성군 이순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를 빌미로 문정왕후는 유관과 유인숙을 사사하고 이들과 손잡았던 사림 세력을 숙청했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다. 사가들은 당시 그녀가 문정왕후와 독대한 자리에서 봉성군을 무고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을사사화를 계기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윤원형은 양재혁 벼서사건을 일으켜 과거 자신을 탄핵했던 송인수·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을 제거하고, 이언적과 백인걸 등 사림 세력 20여 명을 축출했다. 이어서 정적으로 돌아선 친형 윤원로를 남원으로 귀양 보낸 뒤 목숨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는 윤원형의 치명적인 실착이었다. 권력에는 부모형제도 없다는 속설의 당사자가 되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것이다.

그 무렵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통해 보우대사를 소개받고 그를 통해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켰으며, 전국에 3백여 개의 사찰을 공인하고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이에 정난정은 불사 중창에 거금을 기부하고 다양한 불교 행사를 마련하여 그녀의 노력을 뒷받침했다. 또 해마다 두세 차례씩 두모포에 가서 물고기에게 밥을 던져주었다.

정난정의 깊은 불심에 감동한 문정왕후는 1549년(명종 4년)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그의 첩의 소생이 다른 집 적자와 통혼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물론 그 첩은 정난정이었다.

이와 같은 전교는 명종의 이름으로 나왔지만 문정대비의 입김이 작용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세가 오른 윤원형은 1551년(명종 6년) 2월 명종에게 조강지처 김씨의 악행을 고발하며 집안에서 내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명종이 이 청원을 받아들이자 윤원형은 즉시 김씨를 쫓아내고 정난정을 정실로 삼았다.

 일찍이 그녀를 소실로 들일 때의 서약을 지킨 것이었다. 그 후 김씨는 가난과 모멸 속에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정난정이 보낸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요녀이자 독녀라는 그녀의 별명이 붙은 이유였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기 넉 달 전인 1553년(명종 8년) 3월 명종에게 ‘윤원형의 첩에게 직첩을 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게 했다. 그리하여 정난정은 합법적으로 윤원형의 부인이 되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었으므로 그녀는 단숨에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고 자식들은 천역에서 벗어나 어엿한 양반이 되었다. 하지만 정난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윤원형으로 하여금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처지의 백성들을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윤원형이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올린 이 상소는 서얼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조 판서 안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얼호통법이 통과되자 숨죽이고 있던 서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1563년(명종 18년) 윤원형이 영의정이 되자 정난정은 정1품 정경부인으로서 외명부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이는 숙종 때 천출로 승은을 입어 원자를 낳고 중전이 되었던 장옥정에 비견될 정도의 성공신화였다.

정난정은 이후 적극적인 내조를 통해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당시 조선의 무관들은 밤의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상계와 화류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정난정의 아버지 정윤겸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덕에 일찍부터 조선의 돈줄을 파악하고 있던 그녀는 부지런히 재산을 긁어모아 남편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했다.

예나 지금이나 파벌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한 법이다. 훗날 사가들은 정난정이 남편의 권력을 미끼로 매관매직과 뇌물을 받아 한성에 집이 15채나 되었다고 비난하지만 기실 그 정도의 재산은 조선의 웬만한 사대부 가문에서는 새 발에 피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문정왕후는 1553년(명종 8년) 7월 명종의 나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친정에 임한 명종은 윤원형을 견제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합한 인물을 수배했다. 그러자 인순왕후의 친정인 심씨 집안에서 인척인 이량을 추천했다.

명종의 후원을 받은 이량은 헌납·수찬·교리·지평 등 언관을 거치면서 이감·신사헌·권신·윤백헌 등 추종세력을 결성했다. 한데 그들은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요직을 독차지하면서 부정축재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문무관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와 병조를 장악하여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과거를 조작하여 이량의 아들 이정빈을 합격시킨 뒤 이조전랑에 앉혔다. 또 자파의 인물들을 언관으로 발탁하여 언론까지 좌지우지하려 했다. 그러자 사림파의 박소립과 윤두수 등이 공론을 이유로 반발했고, 윤원형은 문정대비를 앞세워 이들을 견제하고 나섰다. 그는 정난정의 조언에 따라 황대임의 딸을 세자빈으로 들여보내기도 했다.

명종 역시 이량의 월권이 도를 넘자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조정에서 쫓아냈지만 곧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한데 조정에 복귀한 이량은 반성은커녕 이전보다 훨씬 탐욕스럽게 권세를 휘둘렀다.

그 무렵 조선 팔도는 거듭된 흉년으로 유랑민이 들끓고 도적떼가 창궐하여 목불인견의 참상이 연출되고 있었다. 탐관오리의 창고에는 곡식이 썩어나가는데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1555년 왜구들이 70척의 배를 끌고 전라도 일대를 휩쓴 을묘왜변이 일어났고, 양주의 백정 임꺽정이 이끄는 도적떼가 1559년부터 1562년까지 3년여에 걸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저었다. 그 때문에 명종은 중종 때 임시로 설치했던 비변사를 상설기구화하고 외침에 대비하도록 했다.

1563년(명종 18년) 명종은 이량이 박소립과 윤두수를 제거하려 하자 심의겸의 도움으로 홍문관을 움직여 이량을 숙청해 버렸다. 이때 윤원형은 자신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과 혼인시켜 명종 사후를 대비하려 했지만 임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세불리를 느낀 그는 이조판서 권철을 자파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몰락의 전조였다.

아니나 다를까 1565년(명종 20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림파는 기다렸다는 듯 척신세력의 상징인 보우와 윤원형을 탄핵했다. 명종이 경연에서 한나라 문제가 외삼촌 박소를 죽인 사례를 언급하자 그 신호에 맞춰 8월 3일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이 윤원형의 죄악을 26조목으로 적시하며 처벌을 종용했던 것이다.

그 중에 첫째는 관비의 소생인 정난정을 부인으로 삼았고, 그녀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 죄였다. 천출의 자식을 감히 왕가에 들여보내려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실부인 김씨의 재산을 빼앗아 굶어죽게 했고, 도망노비들을 비호했다는 죄목도 포함되었다. 혐의의 대부분이 정난정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림의 시각에서는 윤원형보다 보우대사와 함께 불교 부흥에 앞장섰던 그녀가 더 미웠던 것이다.

  

그해 8월 21일 윤원형은 파직되어 황해도의 강음 땅으로 방귀전리되었다. 방귀전리(放歸田里)란 유배형보다 한 등급 가벼운 조치로 벼슬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내쫓는 형벌이었다. 그러자 정난정도 그와 동행했다. 그들은 명종이 자신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천출에 대한 양반들의 집요한 공세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1565년(명종 20년) 8월 27일,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명종에게 정난정의 부인첩을 회수하여 정처와 첩실의 명분을 바로세우라고 상주했다. 그들은 또 황대임과 안함, 윤춘년의 죄상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엄벌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황대임은 윤원형의 먼 친척이었고, 안함은 윤원형과 사돈이었으며, 윤춘년은 족제였다. 특히 윤춘년은 윤원형의 일가 동생인데 윤원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뒤 승진을 거듭했고, 윤춘년은 스스로 득도했다면서 불가와 노자의 학설을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조치를 함부로 뒤집을 수 없었으므로 치죄를 거부했다.

임금과 신료들의 형식적인 상소와 거절이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결국 명종이 못이기는 척 그들의 청을 가납하면서 정난정은 졸지에 첩실로 강등되었다. 한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해 9월 8일 윤원형의 전부인 김씨의 계모 강씨가 정난정을 김씨 독살 혐의로 고소했던 것이다.

“사위 윤원형은 젊었을 때 딸 김씨와 결혼하여 여러 해를 함께 살았는데, 정윤겸의 서녀 정난정을 얻은 이후 임금을 속여 내쫓았습니다. 게다가 김씨의 계집종 구슬이·가이·복한·복이와 사내종 향년·복년·허년·명장 등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원주인을 능멸하고 모욕하게 했고, 가산을 모두 빼앗고 마침내 종적을 없애 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씨가 매우 굶주려서 정난정에게 먹을 것을 구하자 정난정이 음식 속에 독약을 집어넣고 몰래 구슬이를 시켜 가져다주었는데 김씨가 먹고 즉시 죽었습니다. 온 집안이 모두 그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나 대단한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소장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소장을 접수한 형조에서는 강상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자신들이 처리할 수 없다며 역모 등 체제사건을 다루는 의금부로 이첩했다. 의금부에서는 구슬이를 비롯한 10여 명의 여종들에게 자백을 강요했다. 그들이 거부하자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결국 장독을 이기지 못한 여인들이 모두 죽고 주거리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짜 맞추기 수사와 고문에 의한 자백이 증거로 인정되던 시절의 공식적인 악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결과가 나오지 않자 그해 10월 14일 좌부승지 홍인경은 명종에게 정난정을 잡아 가두고 추국하기를 청했다

의금부는 사건의 진상 파악보다는 정난정 한 사람에 대한 공격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국상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삼촌과 외숙모를 죽이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으므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막다른 상황을 감지한 정난정은 냉정하게 최후를 대비했다. 그녀는 국청에 마소처럼 끌려가 뭇 양반들의 망신과 조롱 속에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정경부인이 되었어도 천비는 끝내 천비인가 보다. 그래도 나는 정경부인으로 죽으련다.”

1565년(명종 20년) 11월 3일 마침 금부도사가 죄를 지은 평안도 장수를 체포해 오던 도중 금교역에서 말을 바꾸어 탔다. 그 장면을 오해한 노비가 정난정에게 금부도사가 오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자 정난정은 갖고 있던 비상으로 미련 없이 목숨을 끊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넋을 잃은 윤원형도 그로부터 5일 후 같은 방법으로 자살했다. 윤원형 부부의 동반자살 소식을 들은 신료들은 쾌재를 부르며 정난정을 천민으로 환원시켰지만 아들 윤효와 윤충원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은 부모가 죄안에 오르기 전에 죽었으므로 공식적으로 죄인의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양반들은 사서에서 정난정을 남편 윤원형을 사주하여 국정을 파탄 내고 강상을 어지럽힌 요녀로 묘사했다. 숙종의 장희빈, 연산군의 장녹수, 광해군의 김개시와 거의 같은 등급이었다. 그들은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도 그녀의 작품으로 왜곡했고, 요녀란 주홍글씨에 걸맞게 의원과 통정했다는 소설도 썼다. 그녀가 정경부인이 되었을 때 등에 종기가 났는데, 의원 송윤덕이 세침으로 치료하면서 여러 번 그 종기 난 곳을 빨아 주었고, 그 뒤로 매일 같이 집에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정난정의 친오빠 정담은 누이 때문에 화를 입지 않으려고 일부러 소원하게 지냈으며, 저택 입구에 미로처럼 복잡한 담을 쌓아 뚜껑 있는 가마가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윤원형이 죽은 뒤에 정담은 사림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난정에 대한 기록은 이처럼 정사나 야사 공히 양반의 왜곡된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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