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의사         2019.09.19.목요일,맑음

안중근 의사(생졸;1879.9.2-1910.3.26)는 1909년10월26일.'동의단지회'를 결성하여 중국 하얼빈 역에서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구한말의 독립 운동가다.

세례명은 토마스며,조부는 진해 현감을 지낸 안인수며,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다.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 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동의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초대 총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09년10월26일,하얼빈역에서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 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했고,

'대한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사형을 언도받아 1910년 여순 감옥(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

이라 불렀으며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황해도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 했으며,말타기와 활쏘기,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4년 갑오 농민전쟁이 일어나 해주 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 때 참가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때 교회의 총대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의 채표 회사 사장을 지냈다.

17세에 결혼해 2남1녀를 두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다시 돌아왔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 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를 인수했다.

1907년,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 보상 운동에 참가하여 국채 보상 기성회 관서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 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과 싸우다가 국외에서 의병 부대를 창설

   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 청년 회의' 임시 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을 만나 의병 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김기룡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 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최재형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 전쟁과 교육 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 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김두성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6월에 특파 독립 대장 겸 아령 지구 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 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 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

   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1909년3월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 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

   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

   한다고 맹세했다.

1909년9월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와 '대동공보'를 통해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 대신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얼빈과 채가구를 거사 장소로 설정하고,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그는 하얼빈을 담당했다. 1909년10월26일,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궁내 대신 비서관 모리,만철 이사 다나카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과 재판 과정에서 한국 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 의용 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 동기를 밝혔다.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측에 인계되어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다.

관동 도독부 지방 법원에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 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 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 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 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양민을 살해한 일,이권을 약탈한 일,동양 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 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와 가마타의 변호 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1910년 2월14일,사형 선고를 받고 3월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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