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 선수 장효조 타계                     2020.01.16.월요일,맑음

장효조(생졸;1956년7월6일~2011년9월7일)는

전 KBO 리구 삼성 라이온주,롯데 자이언츠의 외야수 이자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이었다.

2011년9월7일,

부산 동아대 병원에서 위암 투병 끝에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초년에는 불교를 믿었으나 말년에는 아들이 목사가 되며 개신교를 믿었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부산 영선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10세 때 대구로 이주했다.

야구를 시작한 때는  대구 삼덕 초등학교 4학년으로,

대구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키 174 cm, 체중 70kg에 지나지 않았던 장효조는

1972년에 대구 상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3년,

2학년때 맹활약을 펼치며 대구상고를 대통령배,봉황대기,황금사자기 정상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금사자기에서는 14타수 6안타를 몰아치며 우수 선수,타격 1위(0.428),최다 안타상을 받았고,봉황대기에서도 타격왕을 수상했다.

일본과의 고교 야구 친선 경기를 위해 대한민국 국가 대표에 선발된 장효조는 한국이 2승

1무로 일본을 누르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74년에도,

대구상고를 봉황기를 우승에 올려놓으며 또다시 타격왕과 최다안타 상을 수상했고,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는 5할을 기록하며 다시 타격상을 수상했다.

장효조는 그 해 출전한 네 개 고교 야구대회에서 0.383라는 타율을 기록했다.

1975년,한양 대학교에 진학한 장효조는 1학년 때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76년,

백호기 대회에서 0.714라는 경이로운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왕에 등극하였다.


실업 팀 포항제철에 입단하였다가 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친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1군 92경기에서 타율 3할 6푼 9리(1위),18홈런(공위),22도루(4위),장타율6할1푼8리(1위), 출루율4할7푼5리(1위)로 천재성을 입증했다.

1983년5월,

8연타석 안타에 3연타석 홈런으로 타율이 0.414까지 치솟았다.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이다.

1985년에는,

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타격 면에서는 우리나라 유일의 4할 타자 백인천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유일한 선수이다.

1988년12월21일,

선수협 사태 인해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 된 후 지명 타자로 뛰었으며,

홀수 해에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등 그야말로 '격년제 징크스'를 겪었다.

이는 최동원과 김시진 등이 트레이드된 후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장효조의 삼성 라이온즈 시절 지녔던 등번호 10번은

후일 1993년에 상성 라이논즈에 입단한 양준혁이 달기도 했는데,

양준혁은 그와 동일하게 좌타자이면서 타격왕을 네 차례나 수상하였다.

양준혁의 네차례 타격왕 수상은 역대 타격왕 최다 수상 횟수이다.

두 선수의 통산 타율은 각각 장효조 0.331와 양중혁 0.316로서 타율 1위와 2위의 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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