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작성일자; 2008.03.18.화요일,맑음

 

생졸, 1394년~1462.9.7

휘; 제(禔) 세종,효령대군,성녕대군  친형 

가계도;

아버지; 태종의 장자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  

처; 김한로의 딸인 수성군부인 김씨

자; 수성군부인 김씨 소생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1394년 정안군과 군부인 민씨(뒤의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02년(태종 2년) 3월 8일 제(禔)란 이름을 받았고 4월18일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 학자인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충녕대군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수업은 뒷전이고 참새나 바깥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다.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1407(태종 7년) 입조하라는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의  명을 받고

1407년9월25일,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완산부원군 이천우,단산부원군 이무,계성군 이래,제학 맹사성,총재 이현,서장관 집의 허주 등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중국에 다녀왔다.

   영락제는 그에게 특별히 시를 지어서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1409년 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 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김한로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획한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1409년 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410년 민무구,민무질의 옥사가 발생했다.

   이 일로 원경왕후는 병석에 누웠고, 친정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 차 대궐을 출입했다.

   이때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두 형의 억울함을 하소연을 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난 터라 이들과 가까이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은 두 외삼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품성이 잘못되었다며 도리어

   외가를 비난했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뒤 대군 시절 스승이던 계성군 이래가 빈객 겸 세자의 스승으로 결정되어 왕자들을 가르쳤다.

이래는 고려말 신돈에게 저항하던 선비인 이존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닮아 그만큼 강직한 선비였다.

양녕대군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궁리할 때 별감으로부터 계성군의 출입을 보고 받자 일부러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서,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들어서자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병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양녕은 부인하였고 이래는 이후 태종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다.

그 뒤로도 이래는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임금 태종에게 아뢰었다.

세자는 이래 등 사부들이 와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였다.

동궁의 뜰 앞에 새덫을 해 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또한 조정의 하례 때에는 머리가 아프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에서 혼자 새덫을 놓고 참새사냥을 즐기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여색을 금하고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부왕 태종이 여색을 밝히고 후궁을 들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가 들인 후궁을 태종이 내침으로서 부왕 태종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1417년,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 봤다가 발각,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왕 불신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조선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난 김호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사족 출신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호기심에 양녕은 김호생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비밀리에 출입하던 중 내시에게 발각되어 도주하다 붙잡혀 어전에서 태종에게 심문을 받았다.

태종은 양녕이 몰래 시중의 잡것들을 불러들여 장난을 치는 등 체통없는 짓을 한다 하여 잡는 대로

혹 귀양 보내기도 하고 혹 죽이기도 했다는데, 김호생에게 붓을 만들게 한 뒤 그의 재능을 본 뒤 오히려 기특히 여기고

그에게 특별이 공조(工曹)로 보내 필장(筆匠)직을 내렸다.

어느날 밤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던 중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의 재질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대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원경왕후 역시 태종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부왕과 모후의 뜻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나 있다는 것을 간파한 효령대군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다.

그는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 고 말했다.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는 야사가 전해 온다.

이에 크게 낙심한 효령대군은 매일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그래서 속담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효령대군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출가, 합천 해인사로 들어갔다.

1418년(태종 18년),유정현 등이 세자 양녕을 탄핵하였다.

   이때 이미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은 양녕을 비호한 이는 황희 등 소수였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될 것을 예상하자 그의 동생 효령대군은 독서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찾아가 세자 자리는 충녕에게 넘길것 같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충고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부왕 태종이나 모후 원경왕후의 뜻이 모두 충녕에게 있음을 안 효령대군은 이후 불교에 전념하게 된다.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이후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경기도 광주의 사저로 내려갔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여자 종 13인과 남자 종 10여 인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한 특별히 배려하여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 가지 가재도구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 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대궐을 떠나던 날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광주의 사저로 나온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와 대학 이외의 책은 금지시켰다.

그 뒤 그는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사귀면서 일생을 마쳤다.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언관들로부터 탄핵되었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1453년에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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