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계비 정순황후           작성일자; 2019.07.28.일요일,맑음

 

정순왕후; 영조의 계비

생졸; 1745년(영조21년)-1805년(순조5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46년 동안 국모의 지위에 있으면서,

   노론 벽파의 정치적 후원자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정조 대의 당쟁,순조 대의 신유사옥 등

   큼지막한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다.

 

 

조선 왕실에는 수많은 왕비들이 있었지만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그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어린 나이에 중전이 되었지만 노쇠한 남편 영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했던 그녀는

친정이 소속된 노론 벽파를 후원하면서 정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에도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손자뻘인 정조의 권력에 끊임없이 도전했다.

 

영조와 정조대에는 미약했던 정치적 영향력은

순조 대에는 대왕대비의 권한으로 3년 동안의 수렴청정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당시 김씨는 정조가 구축한 탕평 정치의 기반을 모조리 파괴하고,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통해 정조를 보위했던 남인 세력을 소탕했다.

그로 인해 노론 벽파는 그녀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완전한 노론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승하한 뒤

시파인 순조의 장인 김조순에 의해 노론 정권이 궤멸되면서

60여 년에 걸친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이 출범하게 되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로 1745년(영조 21년) 12월 2일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1757년(영조33년)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759년(영조35년)6월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리고 15세의 나이로 51세 연상인 영조의 계비가 되었다.

   그와 함께 아버지 김한구는 영돈녕부사 오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어머니 원주 원씨는 원풍부부인에 책봉되었다.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은

인조 때 충청도,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김홍욱이

소현세자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죽음을 당하면서 중앙에 알려졌다.

김홍욱의 증손 김흥경이 영조 대 영의정에 올랐고,

그의 아들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에 봉해지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화순옹주는 월성위가 1758년(영조34년) 사망하자

몹시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한 끝에 14일 만에 사망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유일한 열녀가 되었다.

 

1763년(영조 39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문과에 급제했고,

종숙부 김한기와 김한로, 종제인 김관주가 연이어 급제했다.

 그 후 경주 김씨 가문은 영조 말년에 외척으로서 세력이 강화되면서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과 대립했다.

이는 훗날 시파와 벽파가 반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 시절부터 몹시 총명하고 사려 깊었다.

1926년 강효석이 편찬한 '대동기문'에는 그녀가 왕비 후보로 간택 받을 때의 일화가 실려 있다.

"당시 김씨는 간택 장소에 들어섰을 때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깔려있던 방석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김씨는 방석에 부친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다른 처녀들은 산이 깊다거나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김씨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다고 대답했다.

물건의 깊이는 가히 측량할 수 있지만 인심은 결코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는 것이다.

영조가 어떤 꽃을 제일 좋아하느냐고 묻자

다른 처녀들은 저마다 복숭아꽃, 매화, 모란꽃을 들었지만 김씨는 목화라고 대답했다.

다른 꽃들은 한 시절만 화사하게 피지만 목화는 백성들의 옷이 되어 평생 따뜻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영조는 효성과 연민에 지혜까지 갖춘 김씨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왕비가 된 김씨는 어느 날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그녀는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라고 꾸짖었다.

그녀가 국모로서의 단호함까지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순왕후 김씨가 입궐했을 때 왕세자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어렸지만 왕비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15세 때인 1749년(영조25년)부터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처리하면서

소론을 가까이 함으로써 노론의 후원으로 왕위에 올랐던 영조와 정치적으로 반목하게 되었다.

그 후 부자간의 불화가 심화되면서 정신병을 앓게 된 사도세자는

증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 발작이 일어나면 궁인들을 함부로 죽이고 깨어나면 후회하는 일이 잦아졌다.

 

1761년(영조37년) 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영조에게 밀서를 올려

사도세자가 비밀리에 평안도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영조가 그 일을 역모로 받아 들이면서 부자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때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가 형조판서 윤급의 종 나경언을 사주하여

사도세자의 비행 10여 조목을 상소케 함으로써 영조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1762년(영조 38년) 윤5월13일, 영조는 창경궁 휘령전 앞뜰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거부하자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인 5월 21일 굶어죽게 했다.

이처럼 정순왕후의 친족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개입했다.

 

그 후 영조가 정조를 세손으로 삼고 장인 홍봉한에게 중책을 맡기자

김귀주는 청주 토반 한유를 사주하여

홍봉한이 세손을 제거하고 은언군 이인을 추대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그 때문에 홍봉한은 청주에서 귀양살이를 했지만 세손의 비호 덕분에 풀려났고,

반대로 김귀주가 모함 혐의로 탄핵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영조 말기에 외척인 경주 김씨와 풍산 홍씨 가문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동생이자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가

양자 정후겸과 함께 세손의 지위를 위협하자 대국적인 입장에서 세손을 보호하기도 했다.

 

1776년에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된 정순왕후는 32세의 나이로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17년의 궁궐 생활을 통해 정치적 역량을 축적한 정순왕후는 그때부터 정사에 적극 개입했다.

그녀는 수차례 언문전교를 통해 정조 즉위에 일등공신이었던 홍국영을 공격했고,

왕실 후계 문제에 관련된 은언군 이인과 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처단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내전의 국정 개입에 부정적이었던 정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조는 즉위 하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정후겸,홍인한,숙의 문씨,문성국,홍봉한 등을

모조리 귀양 보낸 다음 외조부 홍봉한을 제외한 모든 인물을 사사했다.

아울러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불경했다는 이유로

김귀주를 귀양 보낸 다음 사사함으로써 정순왕후를 진노케 했다.

 

1778년(정조 2년)에는 자신을 적대시하던 화완옹주를 강화도 교동부에 위리안치하고,

옹주의 작호를 박탈해 버렸다.

정조는 그처럼 정적들을 일소했지만 왕대비 정순왕후에게는 예를 다했다.

 

1778년(정조 2년) 5월,정순왕후에게 예순(睿順),성철(聖哲),장희(莊僖) 등의 존호를 올렸다.

정순왕후는 이에 답하여 왕대비의 권한으로 정조의 후궁 간택을 추진했다.

중전 효의왕후가 병으로 후사를 이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홍국영의 누이 동생 원빈 홍씨가 입궐했지만 1779년(정조 3년) 1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정조의 신임을 독차지하던 홍국영은

세도정치를 펼치며 상계군 이담을 완풍군으로 삼고 후사에 개입했다가

1780년(정조4년) 전격적으로 삭탈 관직 되어 강릉으로 방축되었고,

이듬해 4월 5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조는 1782년(정조6년)9월7일,

의빈 성씨로부터 원자를 얻자 왕대비 김씨에게 ‘혜휘(惠徽)’라는 존호를 올렸다.

1784년(정조 8년)은 영조가 즉위한 지 주갑이 되는 해였으므로

왕대비 김씨에게 ‘익열(翼烈)’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1786년(정조10년)5월11일,

문효세자가 갑자기 요절하더니,9월14일에는 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까지 사망했다.

또 윤7월에는 귀양살이 하던 김귀주가 사망하고,11월에는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급서했다.

이처럼 왕실에 불상사가 겹치면서 정순왕후와 정조의 사이가 더욱 멀어졌다.

그해 12월1일, 정순왕후는 홍국영을 역적으로 규정하는 언서를 정조에게 보냈고,

은언군을 역당의 배후로 지목하여 처벌하라고 종용했다.

왕대비 하교가 거듭되자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은언군을 강화부로 귀양 보냈다.

은언군을 둘러싼 정순왕후와 정조의 대립은 공의를 강조하는 정순왕후와 사의를 앞세운 정조의 대립이었다.

당시 정조는 충역(忠逆)의 의리를 종친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논리를 앞세웠지만

관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했다.

정순왕후는 은언군이 사적으로는 국왕의 동생이지만 역적으로 지목된 인물인 만큼 국법에 따라 처분해야

한다며 공론을 일으켰다.

 

1794년(정조18년) 4월10일,정순왕후는 정조의 건강이 악화되자

언문전교를 내려 의관들에게 병환의

원인을 밝히라고 독촉했고,직접 약을 처방했지만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녀가 왕실의 안정과 정치적 실리 사이에서 공정한 행보를 취하려 애썼음을 보여준다.

 

1800년6월, 정조가 승하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신하들은 수렴청정을 간청했다.

그러자 정순왕후는 주상의 나이가 어려서 직접 정사를 처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서용보를 우의정으로, 윤행임을 홍문관 대제학으로,이만수를 예조판서,

이득신을 공조판서로 임명하여 벽파 중심으로 조정을 운영했다.

 

7월20일에는 정국의 현안을 파악하기 위해 모든 조보,소장,차자를 언문으로 등서하여 들이게 했다.

이어서 ‘왕대비전-혜경궁 홍씨-수빈 박씨’의 순으로 명위와 문안의 차서에 대하여 하교했다.

그러자 왕대비 효의왕후는 자신이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보다 위에 있다 하여 사양했지만

왕실의 서열은 원칙의 문제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또 주상이 어리고 국세가 위급하므로

주상의 보호와 권도의 책임이 척신에게 있다 하여 국구인 김조순과 수빈 박씨의 아버지 박준원을 등용했다.

 

정순왕후는 1801년(순조1년)1월28일, 윤음을 통해 정조 대부터 추진되었던 공노비 혁파를 명했다.

그리하여 노비안이 돈화문 밖에서 소각되었고,내시 노비가 양인이 되었다.

2월24일에는 지방의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노비대장을 비롯하여 내탕고의 노비대장까지 소각되었다.

공노비 혁파는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어 국가의 양약에 편입시킴으로써 재정을 확충하려는 의도였지만

지배층에서 자발적으로 신분차별을 철폐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가문의 입장에 따라 정치적으로 노론 벽파를 적극 후원했다.

그녀는 선왕 영조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벽파의 인물들을 중용했다.

아울러 정조 대부터 역모 혐의를 제기했던 은언군 이인을 사사했다.

또한 영조,정조 연간에 정치권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신임의리와 임오의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홍낙임,김이익,김이재,김이교,정민시,서유린,채제공,정약용,이가환,이승훈 등을 모조리 조정에서 축출했다.

그 결과 정조가 구축했던 탕평 정치의 기반이 무너지고 그녀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파와 심환지를 필두로

하는 노론 벽파의 일당 체제가 성립되었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 초기에 윤행임 등 정조의 총애를 받던 관리들을 우대했고,

홍낙유에게 이조참의를 제수했으며,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의 묘에 정조가 친히 쓴 행장을 가지고

가서 제사하도록 하는 등 정적들에게 정치 보복의 의사가 없음을 보여 주였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 동안의 정치적 제스처일 뿐이었다.

정조의 장례 일정이 끝나자마자 정순왕후는

영의정 심환지의 주청에 따라 정조 치세에 죽음을 당한 자신의 오빠 김귀주과 숙부 김한록을 신원했고,

김용주,김관주,김일주 등 척족들을 조정으로 끌어들였다.

그와 동시에 정조의 측근들에게 화살을 돌려 도승지 윤행임을 사사하고, 홍국영의 관작을 추탈했다.

 

1802년(순조2년) 1월에는 호조의 경비 부족을 이유로 정조의 친위 부대였던 장용영을 혁파하고

장용영 내영의 별고와 외영의 각 창고를 내탕고에 환속할 것을 명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노론 벽파는 약진했지만

정조 대에 탕평책의 일환으로 중용되었던 시파와 남인 세력은 피바람을 맞았다.

정순왕후는 남인들이 서학으로 받아들인 천주교를 이용하여 그들을 일소하고자 했다.

일찍이 정조는 ‘정학이 밝아지면 사학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며 천주교에 유연한 태도를 취했지만,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무부무군의 패륜지당으로 몰아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1801년(순조1년)1월10일, 정순황후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를 근절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오가작통법은 본래 범죄자 검거,세금 징수,부역 동원을 위해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었던 호적 제도인데 이때부터 천주교도 색출 방법으로 변질되었다.

그해 4월,체포된 이가환,권철신 등이 고문 도중 사망했고,

이승훈,정약종,최창현,강완숙,최필공,홍교만,홍낙민,김건순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자수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도 군문 효수 되었다.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은 은언군 이인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 등이 사사되었다.

 

그해 10월,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다다르 한 해 동안 3백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다.

신유사옥을 통해 정순왕후는 완전한 벽파 정권을 수립하는 데 일조 했지만

1802년(순조2년)9월6일,

삼간택을 행하여 정조가 죽기 전에 세자빈으로 내정되어 있던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간택함으로써 벽파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

 

1803년(순조3년)12월13일,창덕궁 선정전 서쪽 행각에서 불이 나 선정전과 인정전까지 소실되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정순왕후는 그해 12월28일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는 하교를 내렸다.

당시 나이 59세였던 정순왕후는 궁중의 소방을 책임지고 있는 병조의 처벌을 중지하고

자신의 부덕함을 탓했다.

그러자 순조도 감선하고 창경궁으로 이어하면서 중외에 구언을 청했으며,정초의 진하 행사도 금지했다.

 

그런데 이듬해 6월23일, 정순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겠다고 나서 조정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이미 연초부터 순조가 친정에 나선 터라 그녀의 변심이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1804년(순조4년)1월10일,순조는 창경궁 명정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진하를 받고 반교문을 반포했다.

이때 순조는 대왕대비의 보령이 60세에 이르고 왕대비가 52세,혜경궁 홍씨가 칠순에 이른 것을 축하하면서

사형수 이하 죄인을 모두 사면했다.

2월에는 대왕대비에게 ‘광헌’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1805년(순조5년)1월12일, 정순왕후는 6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여 영조의 원릉에 합장되었다.

정순왕후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순조는 ‘융인’이라는 존호를 추가했다.

 

정순왕후가 승하한 뒤 김조순을 비롯한 시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806년(순조6년), 벽파인 우의정 김달순이 순조에게 노론의 신임 의리를 각성시키려 하자

김조순을 비롯하여 수빈 박씨의 친정 반남 박씨,풍양 조씨 조득영이 가세하여 김달순을 탄핵했다.

이를 기화로 시파는 이전에 순원왕후 김씨의 삼간택을 방해했던 김관주를 귀양 보내는 한편,

이미 죽은 김귀주와 심환지 등을 역모로 다스렸다.

당시 김이영은 정조의 즉위를 막기 위해 노론이 퍼뜨린 ‘16자 흉언’을 거론하여 잔여 벽파 세력을 일망 타진했다.

이 병인경화(丙寅更化)라는 사건을 통해

정조 사후 5년 동안 정순왕후에 기대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노론 벽파가 완전히 몰락했고,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자리 잡게 된다.

 

정순왕후는 조선시대에 왕의 계비,왕대비,대왕대비로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정치에 간여했던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녀의 남다른 정치 행보는 왕실과 친정을 지켜야 하는 시대적인 운명도 있었겠지만,

자식을 얻지 못한 여인으로서의 설움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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