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윤회 이야기     작성일자; 2019.07.24.수요일,흐림

 

 

숙종 때 일입니다.

암행어사가 민정을 살피기 위해 경향 각지를 유랑 하다가

사불산 문경 대승사에 이르러 젊은 스님들이 누각 위에 앉아 장기 두는 것을 보았다.

“장이야 장 받아라.”

“무슨 장?”

“상장 아니야.........”하니 옆에 있던 스님 한 분이 말(馬)로 상을 치고 차(車)로 길을 트고 도리어, 

“멍군 받아라.” 하고 소리쳤다. 

 

암행어사가 생각하기를 수도하는 스님이라면 염불이나 참선을 해야 하고

또 공부가 다 된 스님이라면 거리에 나서 무량한 중생을 깨우쳐 주어야 하는 것인데

젊은 스님들이 누각에 걸터앉아 대 낮에 장기를 두다니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면서 법당 앞에서 철철철 오줌을 쌌다.

그 때 한 스님이 이것을 보고 외쳤습니다.

“여보시요. 뉘신지는 몰라도 의복은 남루해도 거동이 선비임에 틀림 없거니

법당 앞에서 함부로 소변을 보다니 이런 무례함이 어디 있단 말이오?”하고 야단을 쳤다. 

러자 어사가 답하기를,

“말(馬)이 가고 차(車)가 오고 또 상(像)이 간다 하기로 나는 마굿간인 줄 잘못 알았소이다.

이 집이 부처님에게 사용되는 집인 줄 알았다면 그럴 리가 있었겠소?”

 

이렇게 대꾸하고

돌아선 어사는 나라에 이 사실을 품고하여

사찰 중들이 무위도식하고 장기나 두고 있으니 무엇인가 일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그 후 부터 남 도쪽에 있는 절의 있는 스님들은 종이를 떠서 나라에 진상하고

금강산 같은 산악에 있는 절 스님들은 잣박산(잣으로 만든 한과 일종의 잣강정)을 만들어 진상토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본이 되어서 인지 지방 양반들도

덩달아서 승려들에게 족보종이를 대라하고 잔치 음식을 만들어 오라 하는 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 부역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진짜 공부를 하려고 하는 스님들도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또 놀기 좋아하던 스님들은 견디다 못해 다 환속 하고는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대구 팔공산 자락의 파계사라 하여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이 절의 용파 대사는 원(願)을 세웠다.

 “내 서울로 가서 권력 있는 이에게 말하여, 파계사만이라도 승려들의 부역을 없애도록 하리라.”

 

그는 이 원을 산중 스님 네들에게 발표하고, 7백여 리 길을 걸어 한양성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대문 밖에 머물러야 했다.

용파 대사는 한강물을 져다가 민가에 날라주며 때를 기다렸지만,

일이 잘 풀리기는커녕 남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원을 이루지 못한 채 3년이 지났음을 탄식하던 대사는 밤을 지새우며 부처님의 가피를 빌었고,

그날 밤 숙종 임금은 남대문 2층에 올라 남대문 밖의 셋째 집 위에서

청룡과 황룡이 찬란한 광명을 놓아 하늘에 사무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아침, 숙종임금은 어전 별감을 불러,

‘남대문 밖 세 번째 집에 가서 기이한 사람이 있거든 데리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

어전 별감이 그 집에 가서 살펴보니 파계사에서 왔다는 용파 스님만있어 어전으로 데리고 갔다.

숙종 임금은 스님께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용파 이옵니다.”

“오! 이름에 용(龍) 용자가 들어서 지난 밤 꿈에 용을 보게 된 것이로구나.

 어찌하여 이 한양 장안으로 온 것이오?”

 

용파 대사는 임금에게 불교계의 어려움과 승려 부역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아뢰면서 소원을 말하자,

숙종임금은 용파대사에게 왕세자를 낳을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청했다.

 “짐이 사찰에 폐되는 일들은 폐지하여 줄 것이나, 짐에게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소원이 있소.

짐의 나이 많으나 아직 세자가 없으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명산 성지에서 기도를 올려 주시오.

백일을 치성하되 한양 백리 이내에 기도처를 정하면, 궁인과 예관들로 하여금 참배하도록 할 것이오.”

 

용파 대사는 이 제안을 쾌히 수락하면서 함께 기도할 스님을 청했다.

 “금강산 만회암에서 공부하던 농산 스님이 지금 한양 근처에 와 있으니, 그 스님과 함께 기도 하겠나이다.”

“그것은 대사께서 알아서 하시오.”

 

이에 농산 대사는 북한산 아래 금선암에서 기도하고 용파 대사는 수락산 내원암에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70여일이 지난 뒤,

용파 대사는 선정에 들어 이 나라 백성들 중 임금의 지위에 오를만한 복을 지닌 사람이 있는가 관찰했다.

그러나 모두가 망상과 어리석음, 자기 이익만을추구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

한 나라의 앞날을 이끌만한 복덕을 갖춘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숙종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면 결국 용파 대사 자신이 죽든지 아니면

농산 대사가 죽어서 왕세자로 환생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농산 대사에게 죽어 줄 것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내가 기도하던 중 선정에 들어 관하여 보니 사람들이 모두 육종범태에 망상진뇌만 가득하여

세자가 될 사람이 없으니, 내가 죽든지 아니면 스님이 죽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나는 본사에 일이 있어 가지 못할 형편이니,

스님께서 자비심을 발하여 임금의 지위에 올라 만 백성을 위하고 불교를 위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자기를 보고 죽을 것을 청하는 편지를 받고 농산 대사는 ‘허허’ 하고 웃었다.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 기도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심었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과(果)가 당도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기도 회향일에 봅시다.“

 

이 편지를 받은 용파 대사는 자기가 보낸 편지 내용과 답신 편지를잘 싸서 보관해 두었다.

백일 기도를 회향하는 날 저녁, 농산 대사는 제자들 앞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50년 동안이나 망건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말씀은 스님이 죽어서 50년 동안 임금 노릇을 할 것을 미리 알고 예언한 것이다.

그날 밤 농산대사는 고요히 입적하였다.

그리고 숙종과 숙빈 최씨의 꿈에 태어나는 것을 미리 현몽하였다.

 

이튿날 아침, 금선암으로 부터 농산대사가 입적하였다는 소식이 임금에게 전하여졌고,

임금은 용파대사를 대궐로 불러들였다.

 

“세자 탄신을 위한 기도가 끝나자 마자 농산대사가 입적하였다하니,어찌 이런 불상사가 있을 수 있소?”

 용파대사는 전에 농산대사에게 보낸 편지 사본과 농산대사에게서 온 답신을 임금에게 올렸다.

 “이 두 편지만 보시면 그 사유를 알 것이옵니다.”

숙종이 편지를 보니 하나는 ‘죽으라’는 내용이요 하나는 ‘회향 날에 보자’는 것이었으며,

스스로 현몽까지 하였으니 태자의 탄생을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숙종은 용파대사의 공에 보답하기 위해 파계사를 중창하도록 명하고,

파계사를 축으로 삼아 반경 40리에서 거두어 들이는 세금을 파계사에 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용파대사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왕실의 위패를 파계사 경내에 모실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그 이유는 왕실의 선대 임금들의 위패를 모심으로서 

유생들의 행패는 무론 각종 부역의 피해 없이 승려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었다.

그리고 왕실의 위패를 모신 것을 계기로 하마비(어른 아이 할 것없이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하는 구역이라는 비석)를 세워

유생들이나 관리들이 말을 타고 절에 들어와 횡패를 부리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왕실의위패(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셨던 것인데, 그 하마비는 현재까지 파계사에 남아 있다.

 

농산스님이 입적한 그 이듬해인 1694년에 왕자가 탄생하였는데,

이 분이 커서 영조대왕이 되었고,

전생에 자신(농산대사)이 예언한 대로 52년 동안 왕위에 머물러서 조선 왕조역대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머무른 왕이 되었다.

 

숙종임금은 용파대사에게 현응(玄應)이라는 법호를 하사하여 용파 스님은 현응 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왕세자로 태어난 영조가 11살에는 파계사에 내려와 현응전(玄應殿)이라는 편액을 써 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 현판은 파계사 위에 소재하고 있는 성전암 암자의 법당에 있다고 한다.

편액은 현응전(玄應殿)이 아니라 자응전(慈應殿)이라고 쓰여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고 14년이 지난 1740년12월에

용파대사가 머문 파계사 원통전을 중건하고 관세음보살상을 개금하면서,

영조 자신이 입고 있던 도포를 보살상의 복장 유물로 넣었는데,

파계사에서 1979년 관세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이 복장 유물이 발견됨으로서,

영조대왕의 윤회 전생 설화가 사실임을 더욱 분명히 일깨워 주었다.

현재 이 도포는 우리나라 중요민속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조대왕 도포 어의

 

 

용파대사는

불교 탄압이 전국적으로 성행하자 크게 한숨을 쉬고 이 일을 시정하지 않고는 아니 되겠다 생각하여

몇 번 관청에 나가 호소하였으나 전무 효력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부처님의 가피로 이 일을 해결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생각하고

남해 거제도로 들어가 홀로 백일을 기약하고 기도하였다.

들어 갈 때는 배 삯을 주고 배를 탔으나 나올 때는 물로 걸어 나올 심산을 하고

그대로 무인 절도에서 백일 먹을 식량만 가지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백일이 지나도 기미는 감감하였다.

 

 “내 죽더라도 힘을 얻지 않고는 이곳을 나가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더욱 분발하였는데

하루는 과연 노인이 나타나,

“이 미련한 중아 굶어 죽으면 그만이지 누가 너의 속을 알아주는 자 있을 줄 아느냐?”하고 빈정댔다.

스님은,  “먹으래야 먹을 것이 있어야지요?”

“이 아래로 내려가면 돌꽃(石花)이 있다. 우선 그것을 먹어라.”하였다.

용파스님이 바닷가로 내려와 보니 과연 돌 사이에 돌 꽃이하얗게 피었는데 그걸 깨뜨려 먹어보니 속이 든든하였다.

한 삼일 그렇게 돌 꽃을 먹고 공부하는데 하루는 무서운 태풍이 불어와 온 바다는 용솟음 쳤다.

이튿날 바람이 개이기를 기다려 바닷가에 나아가니 배 한 척이 놓여 있는데 거기 쌀 두 가마니와 소금 한 말이 있었다.

부처님 말씀에, “주지 않는 것은 갖지 말라.”하였으므로 그는 보고도 그냥 돌꽃만 따먹고 올라 왔다.

그러자 다시 그 노인이 나타나, “그것은 임자가 없는 물건이니 갖다 먹어라.”라고 하였다.

스님은 그것을 먹고 공부하기 1년, 마침내 신통을 얻고 물위로 걸어 나왔다.

부산 사람들은 그를 보고 파도를 타고 오는 것과 같다고 하여

낭파(浪波),용파(龍波)라 하였는데 뒤에 호를 용파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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