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과 인수대비   2012.05.06.일요일,맑음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 조선 초기 세자빈이자 덕종(추존왕)의 왕비다.  

생졸; 1437.10.07-1504.5.11

능;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경릉(敬陵)

 

 

1450년(문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의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덕종)과 혼인하여 하였고

1455년(세조 즉위년)에 수양대군이 왕위로 즉위하자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나,

1457년(세조 3년)에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다.

1469년에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등극하고

자신도 궁궐에 다시 들어가 왕비로 진봉   되었다가

1475년(성종6년) 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가 되었다.  

좌의정 지낸 한학과 홍씨 사이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문과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열녀''여교''명감''소학'등에서 발췌하여 내훈을 편찬하였다.

내훈은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의 수신서 이자 당시 여성 교육의 기본서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불교 옹호론자로 불교 억불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4차례의 격한 논쟁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금승법과 그녀가 추진한 봉선사 금자경 간행 작업이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할머니로도 유명한데,

며느리 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폐비 윤씨가 왕비 시절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사건으로

내쫓기고 사사는 전적으로 할머니인 인수대비의 의지로 단행 되었기 때문이다.

 

 

1504년(연산군10년)봄,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했다.

이 과정에서 윤씨를 폐비하고 사사하는 데 개입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추방했는데,

인수대비는 당사자가 되므로 손자인 연산군과 갈등을 빚었다.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는 인수대비(한학의 딸)와 혼인하여 월산군과 자을산군(훗날 성종)을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으며,

동생 해양대군이 부친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8대왕인 예종이다.


예종은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 동안 왕위를 유지하다  29세로 죽은 비운의 왕이기도 하다.두 아들(인성,제안대군)을 두었으나 큰 어머님 (훗날 인수대비)와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 명회의 정치적 결탁으로 두 아들은 왕위를 잊지 못하고 대신 조카인 자을산군이 왕권을 잇게된다.

 

세조의 정변과 함께한 훈구 세력인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으로부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결과는 종친 이준과 이징옥의 난을 정벌하고  28세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 장군 등 훈구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신진 세력의 몰락과 본인의 사망으로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죽은 왕이기도 하다.

 

예종의 첫째 부인은 당시 실력자인 한명회의 딸(장순왕후 한씨;한명회의 셋째딸)로 이 둘의 결혼은 선친 세조와 한명회의 권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첫째 부인이 일찍 사망하고 그 아들도 일찍 사망하여 세조가 죽기 바로 전에 둘째 부인 안순황후 한씨가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이 제안대군이다. 한 명회는 딸과 손자를 잃어서 정치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으나,그 후 인수대비와 또다시 결탁하여 그의 딸을 성종의 부인(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넷째딸)으로 다시 혼인시킴으로써 두 딸을 왕비로 만들었다.

 

남이의 옥사남 이는 16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7세에 이 징옥의 난을 정벌하여 세조 때 이미 병조판서를 지낼 정도의 출중한 무관이었다. 그리고 이 방원(태종)의 외손주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최고의 모사꾼인 유 자광의 음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한 명회를 비롯한 훈구 세력의 계략에 의해 남 이를 정치적으로 경쟁자라고 믿었던 예종이 자충수를 둔 결과라 하겠다. 세조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한 명회를 비롯한 구세력과 귀성군, 남 이 등의 신 세력간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으나 세조 사후 구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예종이 오히려 그 견제세력이 될 수 있었던 신진세력 가운데 중심 인물인 남 이를 오히려 제거하고 말았으며 결국 본인도 구세력의 권력 아래로 전락하고 만다. 즉, 구 세력의 핵심인물들이 유 자광을 사주하여 남 이를 죽게 하고 본인도 왕위 14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예종은 선친 세조와 같이 정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았던 한명회 등의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엄격한 조치를 취했는데,그 하나가 분경을 금하는 것 이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대납을 금지하는 것 이었다.분경이란 분주하게 다니면서 이권을 경쟁한다 에서 비롯된 말로 정치권의 실세를 찾아 다니며 관직을 부탁하는 인사청탁을 말한다. 인조는 인사와 관련된 권력의 남용은 종친, 대신, 공신을 막론하고 무조건 목에 칼을 씌워 보고하고 족주(온 가족을 다 죽인다)한다고 했으니 당시의 권력자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그리고 대납이란 타인이 먼저 서울에 올라와 선납하고 지방으로 돌아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인데 그 값이 정상 세금의 몇 배가 되어 이 것이 공신들로 하여금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갖게 한 제도였다. 이런 제도는 세조가 신하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충성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기막힌 제도였다.예종의 이런 조치는 훈구세력에게는 직격탄이 되었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야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종이 승하한 후 예종의 모친 즉, 정희왕후는 당연히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차기 왕(주상)으로 천거를 해야 하는데 , 제안대군이 어리고(당시 4살) 예종의 둘째 조카인 자을산군이 세조가 총애했다는 이유를 들어 자을산군을 주상으로 천거한다. 여기에는 훈구세력과 인수대비간의 정치적 담합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예종의 첫째 조카 즉, 인수대비의 큰 아들인 월산군의 장인이 훈구세력이 아니라 신진 세력이었기 때문에 훈구 세력들은 이를 기피하였고, 인수대비는 둘째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릴 수 있다면 굳이 이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예종의 모친인 정희왕후는 권력의 힘 앞에 자기 친 손자인 제안대군을 왕위에 올리지 못하고 오히려 훈구세력들의 의견대로 따라가게 된다. 예종의 사인은 족질인데 죽음 후 이틀 만에 시신이 검게 변하고 (이는 보통 약물 중독에 의해 사망 할 경우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함) 예종이 오전 9시 이전에 사망하였는데 성종이 당일 오후 4시경에 즉위식을 거행했다는 점 등이 예종의 죽음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세자빈자리에서 쫒겨나 평범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인수대비나, 중전의 딸과 손자가 모두 사망하여 커다란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던 한 명회에게 예종의 죽음은 이들로 하여금 한 여자는 대비가 또 한 남자는 국구(중전의 아바지)가 되는 영광을 주었으니, 두 독한 남녀의 정치적 결합은 예종의 죽음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었으면 왕위를 이었으나 권력의 야합에 의해 종친으로 전락했으며 이런 과정에서 생긴 권력에 대한 불만은 세상을 바꿔버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발전하여 조카인 연산군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복수극을 벌이는 참사로 나타나게 된다.

 

 

 


 

 

  

 

 

 

생졸;1437.10.7(음9.8)~1504.5.11음(4.27)는 조선 초기의 세자빈이자 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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