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두인 (吳斗寅)        2019.07.14.일요일,맑음

오두인; 서인,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의 17세손이다.

생졸; 1624(인조 2)~1689(숙종 15)

본관; 해주

호; 양곡(陽谷)

제향; 고향인 경기도 양성(陽城: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의 덕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증조부; 병마절도사 오정방

조부; 좌찬성에 추증된 오사겸

부; 이조판서 오상

모; 병조 참판 이성길의 딸

며느리; 조선 제18대 왕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


오두인은 어려서부터 총민하였고 됨됨이가 차분하고 중후하였으며 숙부인 오숙에게 입양되어 황해도 해주에서 성장하였다.10살 때 명나라 사신인 부총 정용이 와서 오두인을 보고 예사롭지 않게 여겨 운자를 주어 시를 짓게 하니,오두인은 붓을 당겨 즉석에서 ‘한정(漢程)’이라는 글자를 써서 알지 못하게끔 비유를 하자

정용이 크게 경탄해 하며 진귀한 선물을 두터이 주었는데,오두인이 다 사양하고 다만 부채 하나만을 받으니, 정용이 더욱 중히 여기며 말하기를, “다른 날 얼마나 크게 될지 헤아릴 수 없도다.” 하고 그 시를 황화집에 실으니, 오두인의 명성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648년(인조 26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49년(인조 27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기도 관찰사,공조판서,한성판윤,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50년(효종1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1656년 장령,1661년(현종 2) 헌납 사간,1665년 사헌부 집의,

   1667년 부교리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5년),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아들인 오태주가 숙종의 여동생인

   명안공주의 부마가 되었다.

1680년(숙종6년), 호조 참판,1681년 도승지, 1682년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683년(숙종9년), 공조 판서에 올랐다.

   명성왕후의 상(喪) 때에 감동한 공로로 정헌대부로 승진되었고,한성판윤에 제수되었으며,

1686(숙종12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689년(숙종15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자 이세화,박태보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졸하였으나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숙종20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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