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회연교               2019.08.03.토요일,맑음

오월 그믐 경연에서의 하교이다.

부친 묘소의 이장과 화성 건설 등의 과정을 거치며 정조의 왕권은 강화되었다. 이즈음 정조 16년(1792) 윤4월 27일 그 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영남의 남인이 대거 참여한 한 장의 상소가 정조에게 전달되었다. 대략 1만 명 이상이 연명으로 참석하였다고 하여 ‘영남만인소’라고 하는 상소였다. 상소를 받아 본 정조는 의아해 하면서 상소를 읽어 내려갔다.

“아니 이렇게 많은 인원이 무슨 일로……”

상소에는 사도세자의 신원과 함께 임오년 의리를 천명하라는 요구가 담겨져 있었다.
상소를 읽고 난 정조는 아무 말없이 상념에 잠겼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참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이에 정조는 다음날 승지 임제원을 불러 물었다.

“소두(疏頭)가 누구인가?”

그러자 임제원은

“이우입니다. 고 옥당 이완의 종제이고 고 교관(敎官) 이광정(李光靖)의 아들입니다.”

하여 소두의 신상을 보고하였다. 이어 정조는 명하였다.

“소두(疏頭)는 전에 올라와 읽어 아뢰도록 하라.”

이우는 국왕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연명한 상소인 가운데 자신이 아는 인물들을 차례대로 불렀다.

김한동·성언집·강세응·강세륜·이경유·김희택·김시찬 등이 호명되었다. 하나씩 국왕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정조는 이우에게 상소를 읽도록 하였다.

이우는 말을 시작으로 거침없이 읽어 내려갔다.

“아, 신들은 한 폭의 의리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지 이미 30여 년이 되었으나 사람을 대해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다만 죽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이우가 상소를 다 읽었으나 정조는 아무 말을 못하였다.

상소를 들으면서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여 말을 하려다가 잇지 못하였다.

정조의 이런 증상은 몇 차례 이어졌다. 잠시 대전 내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정적이 깨지면서 정조는 심경을 토로하였다.

“마음이 억눌리고 막혀 말에 두서가 없어서 말하자니 먼 곳에서 온 유생들이 보는 데 좋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는 상소에 대해 대략 답변한 후 치하하는 것으로 상소에 대한 비답을 마쳤다.

“오직 나의 본뜻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서로 경계하며 천명할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너희들 영남의 진신과 유생들의 공로이다.”

사실 영남 유생들의 상소는 그 동안 정조의 머릿속에서 잠시라도 떠나지 않았던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하루아침에 추진할 수는 없었다. 그

러나 그 기초는 이미 사도세자의 묘소 이장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정조는 영남 유생들의 의사는 지지하면서 그것의 실행에 있어서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다.

그런데 영남 유생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2차 영남만인소가 얼마 후에 제출되었는데,

여기서도 유생들은 정조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정조의 대답은 똑같았다.

영남 유생의 두 차례에 걸친 만인소를 통해서 이제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여론 조성에 성공하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였다.

정조1800년(정조24년)5월30일, 내의원 책임자들을 불러들인 상황에서 정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장황
하게 강조하였다.

“오늘 연석에서 하교한 것은 맨 먼저 고금의 의리가 시대 상황에 따라서 다른 것을 말했고 다음은 규모,

그 다음은 인물을 등용한 문제, 그 다음은 가르침을 펴고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방안에 대해 말하면서

여러 번 되새기고 반복하였는데, 마디마다 세교를 부식하고 구절마다 고심을 드러내었다.”

이를 오회연교라 한다.


오회연교는 많은 발언이 있었는데 중요한 것을 몇 가지만 지적해 보면,

일단 사도세자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임오화변에 대해 노론들은 책임이 있다는 것과,

재상을 임명할 때는 8년 단위로 한다는 점과

세도를 바로 잡겠다는 것인데 여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경고성 발언도 포함되었다.

그간 정조를 반대하던 노론세력들은 이를 수긍한다면 모두 죄인이므로 백기를 들어야 하였다.

그러나 이를 수긍할 수는 없었다.

이서구는 정조가 제시한 의리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풍속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은 그 또한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함없이 밀고 나가는 도를 견지한 뒤에야 비로소 차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이서구를 강경하게 다스리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김이재가 정조의 측근세력인 소론의 이시수를 비난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정조는 김이재를 사주한 배후 조정자에게 처음에는 자수하도록 하였으나 자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정조는 심환지 등과 마주앉았다.

정조는 심환지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을 말하였다.

“크거나 작은 일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것까지도 다 차츰 피곤해지는데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畏)’ 자 한 자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나의 가슴 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선 경들 자신부터 임금의 뜻에 부응하는 방도를 생각하도록 하라.”

그러자 심환지는 정조의 견해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수긍하는 뜻을 비쳤다.

“경 또한 늙었지만 저번 연석의 분부 속에 자기 자신을 경멸하면 남이 따라서 경멸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또한 경들이 스스로 반성할 점이다.”

결국 심환지 당신도 잘못한 것이 있으니 반성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당시 노론계 벽파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심환지까지 불러 반성하라는 등 점차 정조가 의도한 것이

추진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늘도 야속하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28일 정조는 경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이로써 정조가 추진하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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