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순봉에 얽힌사연       작성일자; 2015.07.20.월요일,맑음

제천과 단양의 경계에는 옥순봉과 구담봉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제천시에 속하지만 두 봉우리 모두 단양팔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옥순봉과 구담봉을 단양팔경으로 지정한 분은 단양군수로 재임 중이던 퇴계 선생이었다.

퇴계는 청풍 도호부에 속해 있는 두 봉우리를 넣어야 단양팔경의 구색이 맞을 듯 싶어

청풍부사를 찾아가 양도를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머쓱하여 돌아오는 길에 퇴계는 옥순봉 석벽에 ‘丹丘洞門’,즉 단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새겨두었다.

단구는 단양의 옛 이름이다.

 ‘단구동문’을 새겨둔 석벽은 현재 청풍호에 잠겨 있다.

훗날 청풍부사로 부임해온 이지번이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휘호에 반하여

아전에게 사연을 물어 경위를 전해 듣고는,

파안대소 하며 즉석에서 옥순봉을 단양에 할양했다는 훈훈한 얘기가 전해온다.

이지번은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의 형이자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아버지로서,

평소 퇴계를 흠모하고 있었다.

이지번의 후손은 대대로 퇴계의 연인이었던 두향의 묘를 보살펴주기도 했다.

 

오늘날 전국 지방마다 지정되어 있는 팔경은

원래 중국 북송(960~1127)의 화가 李成이 그린 <소상팔경도>에서 유래했다.

<소상팔경도>는 중국 서화 베끼는 걸 큰 예술적 성취로 여기던 조선의 사대주의에 힘입어

한양팔경이니 관동팔경이니 하며 전국적으로 팔경 붐을 일으켰다.

문경만 해도 경북팔경 제1경으로 진남교반이,

제2경으로 문경새재가 지정되어 있다.

이와 별도로 경천댐‧문경새재‧봉암사 백운대‧선유동계곡‧쌍용계곡‧용추계곡‧운달계곡‧진남교반 등이

문경팔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가은면 같은 곳에도 풍류를 아는 면장이 부임한다면 가은팔경을 정하겠지만,

가은면장을 지낸 병옥이가 기회를 놓친 이후 지금까지 임자를 못 만났다.

실제 가은에는 문경팔경을 능가하는 절경이 무지하게 맣다.

고향에서 줄창 살고 있는 사람들은 늘 보는 풍경이라 그 아름다움을 실감하지 못하고,

외지에서 이따금 오는 사람은 볼 때만 감탄하고는 고향을 떠나면서 까맣게 잊어버린다.

 

 

 

단양팔경은 옥순봉과 구담봉을 비롯하여 도담삼봉‧석문‧사인암‧상선암‧중선암‧하선암 등이다.

퇴계와 두향의 로맨스가 얽힌 강선대가 왜 빠졌을까 궁금하던 참에,

책장을 넘기자니 유홍준도 단양에는 그 밖에도 단양팔경에 버금가는 볼거리가 많다며 강선대도 넣어놨다.

단양팔경은 지방의 팔경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여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갔다.

영조 때 화가 권신응(1728~1786)은 몸져누워 계시는 할아버지를 위해 일일이 팔경을 찾아다니며

<단구팔경>을 그려다 드리기도 했다.

유홍준은 ‘산수화는 원래 와유(臥遊)를 목적으로 유래했다’고 설명해놨다.

즉,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누워서 즐기도록 그려다 바친 그림이라는 것이다.

1977년 충북향토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단양군지」에는

‘단양팔경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 군지가 처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전인수도 이 정도면 노벨상 깜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이 있다.

좋은 경치는 영상이나 사진으로 볼 때가 더 아름다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종 때 민비에 의해 영의정에 오른 이유원(1814~1888)은 그 흔한 이치도 깨우치지 못했던지,

젊은 시절에 쓴 「임하필기」라는 기행문에서 단양팔경을 이렇게 평가했다.

<혹자는 단양팔경을 보고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금강산은 산이 높고 바다가 깊다.

이에 반해 단양팔경 가운데 가장 빼어난 옥순봉‧구담봉‧도담삼봉은 동해에 갖다 놓으면 작은 돌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필자의 그릇을 짐작할 수 있는 메마른 여행기다.

단양팔경은 그곳 산수와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빛나는 것이지 왜 동해에 갖다 놓는가 말이다.

그런 안목으로 여행은 뭐 하러 다녔는지…

이유원보다 한참 선배인 현종 때 문인 윤선거는 「파동기행」에서 일찌감치 단양팔경을 이렇게 정리해놓았다.

‘금강산에는 이러한 물이 없고, 한강의 다른 곳에는 이러한 산이 없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 지방의 절경은 다른 고장의 명승지와 비교하지 않고 각 고을마다 팔경을 정하는 것이다.

 

 

 

 

옥순봉(해발 286m)은 제천팔경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행정구역상 옥순봉은 늘 제천의 산이었는데.

산 이름을 옥순봉이라고 지은 것도 퇴계가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였다.

막 비가 갠 후에 보면 옥처럼 푸른 봉우리들이 죽순 돋아나듯 우뚝우뚝 솟아났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옥순봉은 강 쪽에서 바라보이는 곳이 가장 웅장하고 아름답다.

충주호 유람선을 타면 청풍나루와 장회나루 사이에서 옥순봉과 구담봉을 완상할 수 있다.

충주호반의 볼거리 가운데서 옥순봉과 구담봉은 단연 하이라이트인 만큼,

청풍나루와 장회나루 구간만 운행하는 유람선이 별도로 있다.

옥순봉과 산자락으로 이어진 구담봉(해발 343m)은 절벽 위에 있는 바위가 거북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깎아지른 장엄한 기암절벽으로 인해 퇴계뿐만 아니라

율곡‧서포‧추사‧단원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이나 그림으로 그 절경을 예찬했다.

 

옥순봉은 단원 김홍도가 52세 때 그린 <옥순봉도>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단원이 기행(奇行)으로 이웃 고을인 연풍현감에서 파직된 다음해다.

단원의 <옥순봉도>는 화강암이 절리 현상으로 인해 수평과 수직으로 동시에

결을 이루는 독특한 형태를 선묘(線描)로 표현해낸 걸작 중의 걸작이다.

각중에 춘화(春畵)가 무지하게 그리고 싶어진 단원은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연풍현의 난제들을 모조리 해결한 뒤,

왜국으로 밀항하여 1년 동안 수백 점의 춘화를 그리고 돌아왔다.

그 소문은 결국 정조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단원의 솜씨와 됨됨이를 사랑하던 정조는

엄벌을 내리라는 신하들의 벌떼같은 상소를 물리치고 현감 직을 삭탈하는 것으로 치죄를 마무리했다.

왜국에서는 요즘도 단원의 춘화가 종종 매물로 나오고 있다.

단원은 산수‧화조(花鳥)‧초상‧풍속‧신선‧인물 등 모든 장르에서 조선제일의 경지를 이룩한 불세출의 화가였다.

 

 

 

 

옥순봉 건너편 제비봉 산자락에는 퇴계의 연인이었던 두향의 무덤이 있다.

강선대 아래 강변에 있던 무덤이 충주호에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단양 유지들이 이장한 것이다.

숙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문인 임방(1640~1724)은

강선대 아래 있던 두향 묘에 참배한 뒤 다음과 같은 헌시(獻詩)를 지어 바쳤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강선대 그 아래 강변에 있네

     어여쁜 이 멋있게 살던 값으로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주었네

 

 

 

사인암(舍人巖)은 단양팔경 중에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기암절벽이다.

깎아지른 암벽이 병풍처럼 수직으로 늘어뜨려져 있고 그 아래로는 맑은 여울물이 잔잔하게 흐른다.

가로 세로 절리를 이룬 화강암의 아름다움은 예로부터 수많은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암벽은 군데군데 철분이 녹아내리면서 틈새에서 자라고 있는 초목들과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하고 있다.

물도 맑고 흐름도 완만한데다,

사방 절경에 에워싸여 있어 여름이면 남녀 불문하고 풍덩풍덩 뛰어드는 바람에 물 반, 사람 반을 이룬다.

사인암이란 이름은 고려 때 단양군수로 있던 임제광이 사인(舍人) 벼슬을 지낸 주역의 대가 우탁(1263~1342)이

이곳에 은거했던 일을 기념하여 지었다.

 

 

 

 

 

 

고려 때부터 워낙 유명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다 보니 사인암은 성한 곳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왜 그리 이름 석 자를 못 남겨 환장하는지,

사인암에도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기명(記名) 낙서들을 해놨다.

사인암 아래 너럭 바위에는 장기판과 바둑판을 그려놓고 오락까지 즐기며 장시간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도 했다.

유홍준은 그 가운데서 잘 쓴 글씨와 잘 지은 글을 가려 예찬하기도 했지만,

글은 종이에 써서 가져갔어야지 왜 자연경관을 훼손하는가.

금강산 기암절벽마다 새겨놓은 ‘김일성 주석 만세!’와 다를 게 무언가.

2011년 단양군청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확인 가능한 이름만 무려 311개라고 한다.

대부분 벼슬이든 서화(書畵)든 한가닥하던 자들이다.

이 기명 낙서 행각은 현대에도 이어져,

지금 이 시각에도 몰지각한 자들이 전국의 절경마다 자신의 무지(無知)를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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