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사 김규식                     작성일자;  2019.11.15.일요일,맑음

 

 

임시 정부 부주석을 지낸 우사 김규식(생졸; 1881.1.29-1950.12.10.70세)은

조선 외교 관리직인 선전관을 역임한 김지성과 경주 이씨 사이의 2남으로 동래부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지성은  일제가 불평등 무역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상소를 올렸다 귀양을 가게 되어,

그 충격으로 모친 마저 죽자 4

세의 나이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에게 입양되어,

그가 세운 고아 학교인 '민로아 학당'과 '구세 학당'에서 1887년부터 교육을 받고 1896년 졸업하였다.

 

1896년7월,언더우드 목사의 주선으로 '독립 신문사'에 입사하였고, .

서재필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하면서

조국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는 사회운동 단체인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1897년 가을,서재필의 권고로 16세 되던 해에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녹 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03년 6월 로녹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 생활을 마쳤다.

그 가운데는 의친왕 이강도 있었다.

  

김규식은 9개국의 외국어 구사에 능통하여 

1919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파리 강화 회의'의 한국 대표로 선발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1903년 가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04년 봄, 귀국 길에 올랐다.

귀국 후 '새문안 교회'를 중심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도와 선교 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경신학교,Y.M.C.A 학관,배재 학당 등에서 교육과 민중 계몽 운동에 전력하였다.

 

'안명근 사건'이라 하는 '안악 사건'은

일제강점 직후인 1910년11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이 황해도 안악에서 무관 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 160여 명이 검거된 사건으로,

당시 일본은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으로 날조하였다.

독립 운동가 최명식이 민족자본의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하려고 했던 '무역회 관련 사건'과 '안악사건'을 연관지어

'데라우치 암살 사건'으로 날조하여 105명의 '신민회' 민족 운동자들을 기소하여한 것이다.

'백범 김구'를 포함해 16명이 최소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안악 사건'으로 국내의 독립 운동 기반이 붕괴되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 운동을 위해 해외로 망명하자

그 또한 1913년4월 중순,망명길에 올라 상해에 도착하였다.

1912년7월, 상해에서 신규식의 주도로 박은식,신채호,조소앙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동제사'는 박달 학원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으로 독립 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는 단체였는데

이학원의 학원의 영어 교수직을 맡았다.

그후,1917년7월,신규식,조소앙,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 단결 선언’을 발표하여 국

내외 독립 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 정부의 수립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제1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폭압적이고 착취적인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정의와 평화를 주창하는 '인도주의'와 '민족주의'의 도전을 받게 되는 국제 정세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1917년,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노농정권이 들어 서면서

약소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지원을 선언하자,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의 민족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1918년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 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상해의 독립 운동자들은 이를 기회로 독립 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1918년8월,여운형,서병호,김철,조소앙 등은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 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신한 청년당'은 1919년1월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민족 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선전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김규식이 파리에 가서 한국 대표로 활동할 인물로 선발된 것이다.

당시 그는 여사와 재혼한 직후였으나 '신한 청년당'의 요청이 있자 이를 기꺼이 수락하고,

1919년2월1일,파리를 향해 상해를 출발하였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19년3월13일이었다.

파리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김규식은 파리에 '한국 대표관'을 개설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외무 총장 겸 강화회의 파리 대표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한국 대표관'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위원부'로 개칭하고,

부위원장에 이관용을,서기장에 황기환을 임명되고 '통신국'을 병설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각국 대표들과 언론사 및 주요 기관에 배포함으로써, 3.1운동 등 한국 독립 운동에 관한 소식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뿐만 아니라 강화 회의에 '일본으로부터 해방 및 독립국가로서 한국의 재편성을 위한 한국 국민과

민족의 주장'이라는 공고서와 비망록을 제출하였다.

여기서 일제의 침략 행위와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으나 열강들의 비협조로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도 못하였다.

독립 외교 활동은 '파리 강화 회의'가 끝난 뒤까지도 이어졌다.

 

이후 1919년8월8일,김규식은 이승만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 위원부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임정의 구미 동포들에 대한 행정 업무를 대행하면서 독립 외교 업무를 수행하여 갔다.

이승만,서재필과 함께 미국무성 당국자들과 접촉하여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후원을 요청하는 등 외교 선전 활동을 펼쳐간 것이다.

1919년9월, 통합 임시 정부가 발족하자 선생은 학무총장에 선임되었고,

1920년12월, 그 동안 미국에서의 활동을 접고 하와이를 거쳐 다시 상해로 향하였다.

1921년1월, 오랜 항해 끝에 상해에 도착한 것이었다.

 

상해 도착 후 선생은 독립 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중국 정부와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인식하여

1921년4월, 한.중 합작으로 항일 운동 단테인 '한중호조사'를 창립하였다.

   하지만 통합 임정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직 후,임정은 내분으로 약화되고 있었다.

1920년12월, 그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던 임시 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하여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독립 운동 방략의 차이로 국무총리 이동휘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즉 외교 독립 운동을 주장하는 이승만과 무장 투쟁을 강조하는 이동휘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것이다.

그 결과 이듬해 2021년1월, 이동휘가 임정을 떠났고 이승만 또한 같은 해 5월 상해를 떠나고 말았다.

 

이에 초기부터 임정을 이끌어 왔던 안창호는 독립 운동 세력의 대동 단결을 위해

혁명적 조치가 필요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국민 대표회의' 소집을 주창하였다.

이때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태평양 지역에 이해 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군비 축소문제와 극동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1921년11월부터 워싱톤에서 '태평양 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 정부에서는 여기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파리 강화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민족 독립을 다시 한번 관철하고자 임정에서는

이승만을 전권대사,서재필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 대표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인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게 하였다.

안창호가 제안한 국민 대표회의는 '태평양 회의'로 말미암아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때 소련으로부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즉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해를 조정하기 위한 '태평양회의'에 대응하여

약소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레닌 정부가,

같은 시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김규식은 이때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 참가를 결정하였다.

그것은 파리 강화회의와 미주 지역에서의 외교 활동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열강에 호소하여 한국 독립을 성취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22년1월부터 2월까지 개최된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김규식은

한국 대표단의 의장단 일원으로 참가 하여 활동하면서,

레닌을 만나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회의가 끝난 뒤 1922년5월, 상해로 귀환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민 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힘썼다.

 

1923년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린 '국민 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임시정부를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기존의 임시 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의 대립이었다.

창조파의 입장에 선 김규식은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자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를 가져 임시 '의정원' 대신 '국민 위원회'를 설치하여

33명의 국민위원을 선출하여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였다.

김규식은 '국민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새 정부의 외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나아가 임정의 '국민 대표회의' 해산 명령이 있자, 김규식을 비롯한 창조파 일행은

레닌 정부의 후원을 예상하고 연해주 해삼위로 갔다.

 

1924년1월,레닌 사망 이후,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소련 정부의 입장이 바뀌게 됨에 따라

김규식을 비롯한 창조파 인사들은 노령으로부터 퇴출 명령을 받았다.

제국주의 열강의 행태에 실망했던 그는 소련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조차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상해로 다시 돌아온 그는 교육 운동에 매진하였다.

상해 '복단대학'과 '동방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한인 학생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중등 과정의 '고등 보습학원'을 세워 운영한 것이다.

그리고 1927년에는 천진으로 옮겨 북양대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1931년9월,‘만주사변’과 1932년1월 ‘상해 사변’을 도발한 일제는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중국 민중의 항일 열기가 높아짐에 따라 

한.중 연대와 대일 항전에 결집할 필요성이 증폭되자

상해로 돌아와 '한국 독립당' 의 이유필과 협의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 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여 갔다.

 

그리하여 1932년11월, 남경에서 '한국 광복 동지회'의 대표로서

(상해)한국독립당, 조선 혁명당,의열단,한국혁명단 등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민족 협동전선으로 '한국 대일전선 통일 동맹'을 탄생시켰다.

이 동맹에서 김규식은 상무 집행위원과 외교 위원장을 맡아 중국측 항일 운동세력과 연합을 모색하여 갔다.

그 결과 한중 양민의 항일 운동단체로 ‘한중민중 통일 동맹’이 결성되었다.

1933년1월, 김규식은 두 동맹의 대표로 항일 투쟁 자금의 모금을 위하여 미국에 파견되었고

1933년8월, 미국에서 투쟁 자금을 모금하여 귀환 한 뒤, '민족대당' 건설에 나섰다.

'한국대일 전선 통일동맹'이 가맹 단체 간의 연락 협의 기관의 성격을 띠어

결속력과 통제력에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민족대당'의 결성이 요청되고 있었다.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민족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 통일전선 형성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1935년7월, 남경의 금릉대학에서 민족 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김규식이 대표인 '대한 독립당과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5당 통합으로 '민족 혁명당'의 창당이 이루어졌다.

'민족 혁명당'의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은

당시 조소앙,김원봉과 함께 규칙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던 그의 신념과 이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해방 직후 '좌우 합작 위원회', 남북 협상 등 민족 통일 운동에 심혈을 쏟았던 밑바탕에는

바로 이 같은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 혁명당'에서 최고 기구인 중앙 집행 위원회 위원으로, 그리고 국민부 부장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민족 혁명당'에서의 실질적인 활동은 거강상의 문제로로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서 '민족 혁명당' 중앙 집행위원이자 당원으로서 신분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1936년 이후 주로 사천성 성도의 사천대학에서 외국문학과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937년7월7일,일제는 노구교 사건을 기화로 중일 전쟁을 도발하자

한국독립운동 세력은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 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1. 1937년8월,한국국민당,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의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 결성과

  2. 1937년11월,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의 조선민족 전선연맹 결성이었다.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이러한 양대 분립은 대일 항전 수행에 차질을 가져올 것이므로

이를 극복하고자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모두에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합작 촉구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양대 계열의 중심 인물인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에서 통합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39년8월27일부터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통합 회의가 열렸지만,

이 회의는 통합 방식을 둘러싼 상반된 입장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0년5월, 중경에서 한국 국민당, (재건)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 우익 3당만이 통합하여

(중경)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였고, 임시 정부의 여당으로 같은 해 9월17일 '한국 광복군'을 창설한 것이다.

 

한편, 민족전선을 주도하던 민족 혁명당은 1938년 10월10일,조선 의용대를 창설하여 한중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1년 봄, 조선 의용대 병력의 상당수가 화북으로 이동함으로써

1941년11월, 민족 혁명당은 임정 참여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의용대 잔여 세력 또한 이듬해 7월 광복군에 합편되었다.

따라서 중국 관내에서 좌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한국 독립당과 광복군, 민족 혁명당과 조선 의용대가 임정을 중심으로

연대와 통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김규식 또한 이때 중경으로 와서

1942년10월 임정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고, 동시에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선생은 1943년 2월 개최된 민족 혁명당 제7차 전당 대회에서 중앙 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4월 주석과 부주석제를 채택한 임정의 5차 개헌에 따라 부주석이 된 것이다.

따라서 임정은

'한국 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 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로 운영 되었다.

그럼으로써 이들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가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낸 것이다.

 

1945년8․15 광복 이후, 김규식은 임정 요인들과 함께 11월 23일, 1차로 귀국하였다.

과도 입법의원의 의장으로 신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힘썼다.

특히 남.북 양쪽에서 단독 정부의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 되자 이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48년4월,김구와 더불어 민족 분단으로 치닫자 북행하여 남북협상에 참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모두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민족 분단 상황을 맞이하였고

1950년6월25일,6.25가 일러나자 납북되어 12월10일,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7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김규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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