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관순                   2019.10.28.월요일,맑음

유관순은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902년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태어나 애국심이 뛰어난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유년기 부터 자유와 평등 의식을 배웠다.

1916년 이화학당에 편입한 후 학업을 이어가던 중 비밀 결사 이문회로부터 독립 만세 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시위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1919년3월1일, 만세 운동이 시작된 후 천안을 비롯한 연기,청주,진천 등을 돌아다니며 만세 운동에 관한

   약속을 받았고,

1919년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또 한번의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에서 선두에 섰으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부모와 친구를 잃고,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검 사국으로 송치된 후 저항을 계속하다가 1920년9월28일 순국했다.

 

유관순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에 일어난'3.1독립 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6세의 가녀린 여학생으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압박에 저항했던 그녀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추모의 염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박은식의 '대한 독립 지혈사'에 따르면 3.1독립 만세운동 당시 무려 7천여 명의 생령이 일제의 총칼에 희생되었다고 한다.수많은 애국 지사들 가운데 유관순 한 사람만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46년경 이화 여고 교장 신봉조와 이화 학당 출신의 박인덕이 유관순

기념 사업회를 설립하면서 부터였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참사로서 '임전대책 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

했고, 황도 사상을 보급하던 '황도학회' 회장으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1949년 반민 특위에 체포된 친일 인사였다.

박인덕은 3.1독립 만세 운동 당시 주동자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옥중에서 유관순에 대한 일제의 악질적인 고문을 목격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출소한 후 독립 운동에 헌신했지만 일제 말기 변절하여 '조선임전보국단'에 참가했고, '임전대책협력회' 상무위원으로서 친일 논설과 강연에 나섰다.

아울러 전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 유격대로 활동하면서 징병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런 인사들이 해방 이후 독립 지사 유관순을 정치적 종교적 방패막이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부끄러운 친일 흔적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또한 2.8독립 선언에 참여했으며, 일제 말기 총독부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의 글을 강요하자 단호하게 거부하고 붓을 꺾었던 늘봄 전여택 작가가 쓴 '유관순 전기'가 유관순 선양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유관순


유관순은 1902년12월16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의 다섯 자녀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감리교도였던 유중권은 구한말 유빈기,조인원 등과 함께 흥호 학교를 세워 국권 회복과 민족 계몽운동에

나섰던 선각자였고, 어머니 역시 선교사들을 통해 독실한 신앙심과 근대적인 여성 의식을 갖추었던 신여성이었다. 이런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유관순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가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익혔고,

생활 속에서 식민지 체제의 부당함을 체험하면서 뚜렷한 민족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16년, 그녀는 감리교 충청남도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엘리스 샤프'의 추천으로 감리교단이

서울에 설립한 이화 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교비생이란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면제받는 대신 졸업 후에 본교의 교사가 되기로 약정한 학생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유관순으로서는 생소한 환경이었지만 이화 학당 선배인 사촌 언니 유예도의 도움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낯선 도시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1919년, 우수한 성적으로 보통과를 수료한 그녀는 이화 학당 고등부로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 무렵 식민지 조선의 내외 정세가 요동치고 있었다.

병탄 이후 일제는 그 동안 한국인에게 내걸었던 온갖 달콤한 공약을 외면하고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강요

하는 등 동화 정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반항하는 자에게는 1912년 개정된 '신태형령'에 따라 순사들의 재판 없는 구금과 구타가 일상화되었다.

이런 폭압적인 지배 체제는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한국인들의 분노를 일깨워 놓기에 충분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자유와 평등사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민족 지도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을 박해하자 일제에 대한 반발심이 거세게 끓어올랐다.

 

한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전승국의 대표 주자였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그것은 세계 피압박민족들이 자발적인 노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해 2월8일,일본의 도쿄에서 공부하던 최팔용 등 10여 명의 유학생들이

'재일 조선 유학생 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 대회에서 독립 운동을 결의하고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여 가두 시위에 나섰다. 이른바 '2.8 독립선언'이었다.

적지 한가운데서 벌어진 빅 뉴스가 현지에서 밀사로 파견된 '송계백'의 전언으로 국내에 알려지면서 한동안 잦아 들었던 애국지사들의 독립 의지에 불이 붙었다.

그때부터 서울에서 뜻있는 학생과 종교인을 중심으로 은밀히 독립 만세 운동이 추진되었다.

이에 발맞춰 상하이의 신한 청년당,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해외 인사들도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종교단체 가운데 천도교가 가장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라는 3대 원칙을 수립하고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이 앞장서서 독립운동 준비를 서둘렀다. 기독교에서도 신한 청년당의 선우혁, 신민회 출신의 이승훈, 양전백 등이 독립 운동을

모색했다. 불교와 유림 일각에서도 결사 움직임을 내비쳤다.

혈기 왕성한 학생들의 움직임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보성 전문학교의 강기덕, 연희 전문학교의 김원벽, 경성 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 등이 모임을 갖고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른 독립 만세 운동 계획을 모의했다.

이처럼 각계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은 민족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하나로 결집하자는 천도교 측의 제안을 모두가 수용함으로써 거족적인 독립 만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윽고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 등 교파와 계층을 초월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면서 독립만세운동

계획은 구체성을 띠게 된다.

거사 일자는 고종황제의 국장일과 3월2일의 일요일을 피하면서 3월 1일로 정해졌다.

민족대표 33인은 손병희의 자택에서 모임을 갖고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계획된 대로 행동하고,

일경에 체포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그 간의 경과를 밝히자고 결의했다.

육당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인쇄소 보성사에서 2만여 매가 인쇄되는 과정

에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철에 의해 발각되었지만 최린이 민족적인 대의로 그를 설득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이윽고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 대표들은 식순에 따라 이종일이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읽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 삼창으로 독립 선언식을 마무리했다.

이때 탑골 공원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자적으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다음 가두시위에 나섰다. 우리 민족의 간절한 독립 의지를 담은 3.1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관순은 당시 이화학당에서 조직한 비밀결 사 '이문회'를 통해 독립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나서기로 맹약했다.

3월1일, 드디어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마친 사람들이 학교 앞을 지나가자 유관순은 여섯 명의 동료학생들과 함께 담장을 뛰어넘어 시위에 동참했다.

당시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이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교문 앞을 막아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3월5일에 벌어진 남대문역 시위에는 사상 최대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강기덕,김성국,김원벽,한위건 등 학생대표들이 앞장선 가운데 이화 학당의 유관순과 정신 여학교의 이애주등 서울 지역의 남녀 학생 대부분이 참가했고, 고종 황제의 인산을 마친 다음 기차 편으로 귀향하려던 지방민들도 대거 합세했다.

                                      

시위는 평화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

전문학교 학생으로 이루어진 선봉대가 대한 독립기를 들고 앞장선 가운데 시위대는 두 갈래로 나누어 행진을 시작했다.

한 갈래는 남대문시장에서 보신각 쪽으로,

또 한 갈래는 남대문에서 대한문,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으로 향했다.

이윽고 보신각에서 합쳐진 시위대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점차 시위에 참여하는 인파가 늘어나고 구호가 드높아지자 당황한 일경은 남대문 근처에 저지선을 만든

다음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총탄에 맞아 피 흘리는 친구들을 업고 흩어지면서 저들의 비인도적인 만행에 이를 갈았다. 그들의 가슴속에 치열한 분노가 들끓으면서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유관순이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일어난 한국인들의 독립 만세운동 열기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선총독부는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3월10일에 이르러 임시 휴교령을 반포했다.

주동인 학생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눈에 불을 켠 경찰과 헌병들은 도심에서 시민 몇몇이 모이기만 해도 곤봉을 휘둘러 해산시켰다.

그 때문에 서울에서의 활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유관순은 동료들과 협의한 뒤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키기로 다짐했다.

3월13일, 유관순은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독립 선언서를 숨겨 들고 천안행 기차에 올랐다.

일제의 삼엄한 검문검색을 피해 고향으로 안착한 그녀는 아버지 유중권의 주선으로 청신학교와 교회를 찾아교사와 학생, 신도들에게 서울에서 벌이지고 있는 만세 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동참을 호소했다.

그녀는 또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 운동을 협의했다.

이에 대하여 선교사 조인원과 김구응,이백하 등 20여 명의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함으로써 시위 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그들은 수차례의 논의 끝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1일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우선 용두리 지렁이골에 총본부를 두고 장명리와 백전리에 연락기관을 설치한 다음 유림 대표와 집성촌

대표들을 설득했다.

    

본래 아우내 장터의 독립 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하고 있었다.

하나는 홍일선,김교선,한동규,이순구 등의 수신면 주민과 이백하,김상철로 대표하는 성남면,갈전면 주민

   들이 계획했고,

또 하나는 동면의 유관순,조인원,조병호,유중권,유중무,조만형,김상훈,김용이와 갈전면의 박제석,박봉래

   등이 계획했다.

이들 두 계열의 주동자들이 서로 연락을 취하여 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

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3월31일 밤,지령리 매봉 정상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내일의 거사를 일깨우는 봉화였다.

그러자 동서남북 각지에서 봉화가 피어오르며 그 뜻에 호응했다.

드디어 4월1일, 갈전면 아우내 장날이 밝았다.

그날 새벽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 일대 외에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관순은 동지들과 함께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열띤 어조로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오전 9시경, 3천여명의 시위 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서 유관순은 단상 올라 지금 전 세계의 피압박민족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있다면서 우리도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자고 부르짖었다.

그녀의 열정적이면서 조리 있는 연설은 군중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이어서 조인원의 선창에 따라 군중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독립 선언식이 끝나자 유관순은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이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 아우내장 터의 분위기는 해방 독립의 공간

그 자체였다. 독립 만세운동이 절정으로 치닫던 오후 1시경 상황을 전해들고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들이

시위대 앞을 막아섰다. 그 와중에 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헌병의 총검에 찔려 쓰러졌다.

분개한 유관순과 동지들은 군중들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 메고 헌병 파견소로 몰려갔다.

그들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신을 파견소 앞 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그때 일부 흥분한 청년들이 파견소로 연결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헌병들은 파견소 안으로 들어가 숨었고, 군중들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오후 2시경, 지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하더니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깜짝 놀란 군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그들은 뒤를 쫓으며 마구 총검을 휘둘렀다.

일체의 경고도 없이 벌어진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0여명이 중상을 당했다.

그날 오후4시경 ,유관순은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린 채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조인원,김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다시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과 헌병 상등병 주곡 등에게 강력하게 항의

했다. 하지만 그녀는 즉시 만세 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천안 헌병대에 구금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공주 검사국에서 유관순을 심문하던 일경은 그녀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하여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 한 몸 편하자고 부모를 학살한 흉적들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공주 검사국에서 갖은 고초를 감내하던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교에 재학 중 만세 운동을 벌이다

잡혀온 오빠 유관옥을 만난다.

시위현장에서 부모를 잃고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된 남매는 부둥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지만 대한  독립의 열망까지 흘리지는 않았다.

얼마 후 법정에 선 유관순은 일본인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일제의 조선 병탄에 대한 부당함을 역설하고

잔인하게 시위를 진압한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잔혹성을 고발했다.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 일본인은 우리 땅에 몰려와 숱한 동포를 죽이더니 마침내 나의 부모님까지

죽였다. 대체 누가 누굴 죄인으로 몰아 심판한단 말인가?”


1919년 5월9일, 공주 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유관순에게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녀가 판결에 항의하여 경성 복심 법원에 공소하자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당시 서울에서 3.1운동을 목도한 영국 '데일리메일' 지의 기자 프레더릭 맥켄지는 저서인'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에서 만세운동의 시작과 탄압, 평양에서 목격한 만세운동, 여학생들의 순국, 세계의 분노 등을

자세히 묘사했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인들의 비폭력적인 항쟁이야말로 고도의 영웅적인 모습이라고 찬탄했다. 하지만 평화적인 한국인의 저항에 비해 일본인의 대응은 실로 야만적이었다.

일본인 헌병과 간수들은 시위 현장에서 잡혀온 여학생과 젊은 여인들의 옷을 찢고 때리고 강간하거나

매질해 죽였고, 담뱃불로 여인들의 은밀한 부분을 태우거나 인두로 지졌다.

유관순이 수감된 서대문 형무소의 여감방  8호실에는 만세 시위를 외치다 잡혀온 여죄수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는 독립 운동가 노백린 장군의 딸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였던 노순경, 개성의 전도부인 어윤희, 구세군 사관 부인 엄영애, 정신여학교 학생 이애주 등이 있었다.

유관순의 죄수번호는 1933번이었다.

그해 5월11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던 프란시스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 프레스 지의 주선으로 서대문

형무소 면회실에서 노순경을 만난 다음 옥리를 추궁하여 그녀들의 수감 현장을 둘러보았다.

어둡고 컴컴한 감방 안에서 그는 잔인한 고문으로 얼굴은 물론 온몸이 퉁퉁 부은 애국지사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여리디 여린 소녀 유관순의 고왔던 얼굴 역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얼마 후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 치료차 풀려난 이애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감방 내에서의 고문과 학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분개한 그는 총독부로 달려가 정무총감 미즈노에게 강력 항의했다.

그 결과 서대문 형무소의 8호실 수감자들은 한 동안 고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월30일, 경성 복심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3년을 언도했다.

그녀는 재차 형벌의 부당함을 항의했지만 9월11일 상고가 기각 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재판과 판결을 전혀 수용할 수 없었던 그녀는 옥중에서 끊임없이 저항했고,

1920년3월1일에는 동지들과 함께 옥중 만세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간수들은 골칫거리 유관순을 어둡고 축축한 지하 독방에 감금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1920년4월28일,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 기념으로 유관순의 형기가 1년6개월로 감형되었지만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20년9월28일, 유관순은 형기를 3개월 남겨둔 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13년11월19일, 국가 기록원이 주일 대사관으로부터 이관 받아 공개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1독립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되어 옥중에서 타살됨.’

그녀가 사망하고 나서 이틀 뒤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에 시신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이화 학당의 모든 외국인 교직원들이 나서서 유관순의 억울한 죽음을 세계만방에 알리겠다고 항의하자 형무소 측은 마지못해 시신을 내주었다.

1920년10월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다음 이태원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1937년 이태원 공동 묘지가 택지로 조성되면서 유골이 사라졌고,

그녀의 존재 역시 세인의 뇌리에서 지워졌다가 해방 후인 1946년 갑자기 구국의 영웅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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