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증(尹拯 )       2019.07.14.일요일,맑음

윤증;

생졸;1629년(인조7년)~1714년(숙종40년)

조부; 윤 황

부; 선거

모; 공주이씨 장백의 딸.

외조부; 성혼


아버지와 유계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와 김집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1663년(현종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1680년(숙종 6), 김수항.민정중 등이 경연에 나오도록 청하고,박세채,조지겸 등이 거듭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했다.


그는 송시열,김석주,김만기.민정중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일로 최신이 송시열의 죄없음을 변명한다는 핑계로 윤증의 사서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했으며, 또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했다.


한편 윤증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윤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안 송시열은 불쾌하게 여겼으며,

또 숙종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이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화를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묘갈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내용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요구

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을 '회니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에, 윤증은 이산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비난했으며, 사국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사림과 간관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노론·소론 간의 당쟁은 계속되었고,

그가 죽은 뒤 1715년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의 발문에 정호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

소론 일파가 거세되고 아버지와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

1722년(경종2), 소론 유생 김수구,황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관되었다.


윤증의 배사문제는 의리·명분의 껍데기를 쓰고 노론·소론 간의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자의 사상적 견해,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놓여 있었다.

양자 모두 '주자도통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훈척인 김익훈 등과 결탁하게 됨으로써 명분을 잃게 되고, 나아가 그 사회경제적 지향도

굴절되게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다.

저서로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명재유서' 등이 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사석/190716  (0) 2019.07.16
⊙ 오두인/190714   (0) 2019.07.14
⊙ 김수홍/190714   (0) 2019.07.14
⊙ 김석주/190714   (0) 2019.07.14
⊙ 허적/190714   (0) 2019.07.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