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사조약(을사늑약)             2019.09.19..목요일,맑음

을사조약(을사늑약)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 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강제로 체결된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자주 주권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을사조약은 체결 당시의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이며,

을사년에 체결되었다고 하여 '을사조약',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기로 했다는 뜻에서 '을사 보호 조약'이라고도 한다.

1904년8월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제1차 한일 협약'에 이어 체결되었다고 하여

'제2차 한일 협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을사늑약'이라는 명칭은 이 조약이 강압적인 상황에서 불평등한 내용으로 체결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관인을 일본 관리가 훔쳐 찍었고,

협정에 임하는 양국의 대표에 대한 양국 통치권자의 위임 절차가 결여되었으며,

한국 고종 황제가 비준을 거부하고 이 조약이 무효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천명하였다는 점 등을 들어 불법적이며 원천 무효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어 각종 반대운동에 일어났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 의병 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7월 가쓰라-데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 동맹 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러시아로부터도 마침내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았다.

 

열강들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에 대한 승인을 얻어낸 일제는 이어서 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한국의 보호국화에 관한 기본 방침을 확정한 것은 1904년5월31일의 내각 회의에서 였다.

내각회의에서 한국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장악, 그리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 등을 통한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결정했다.



이같은 결정에 앞서 이미 1904년2월10일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2월 23일 일본군 1개 사단이 서울에 진주하며 위협을 가하는 가운데 '한국정부는 시정 개선에 대해 일제의 충고를 허용한다'는 한일의정서를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의 길을 열었다.

그후 한일의정서 시행세칙을 내세워 군사행동과 토지의 점령·수용을 자의적으로 단행했으며,

8월 22일 '한일 외국인 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를 체결하게 하고, 군사·재정·외교 고문을 파견했다. 1905년 2월에는 협정에도 없는 경무고문과 학부참여관을 파견하여 한국의 내정을 장악해나갔다.


이같은 정지작업을 거쳐 일제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 체결은 1905년11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이등방문)가 한국에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고,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을 위해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고종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이토는 11월 17일 한국정부의 각료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보호조약을 승인하게 했다. 일본 군인들이 무력시위를 벌이는 공포분위기 속에 열린 이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다시 궁중으로 회의장소를 옮겼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하야시 공사는 이토를 불렀다. 헌병사령관까지 대동하고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찬성여부를 물었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탁지부대신 민영기,법부대신 이하영 등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군부대신 이근택,내부대신 이지용,외부대신 박제순,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동한 5대신(을사5적)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 전권 공사 하야시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협상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내용은

제1조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 영사는 외국에서의 한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

제3조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하는 권리

   를 가지고,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을 설치해 본협약

   의 조관을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한다는 것 등이다.


서울 시내의 모든 상가는 철시를 단행하여 조약 체결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각급 학교의 뜻있는 교사와 학생들도 동맹휴학을 결행하고 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했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 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밖에 수원 정거장에서 이토에게 돌을 던진 농민 김태근과 을사5적의 암살을 기도하다 체포된 기산도·이종대·김석항 등 개별적인 의열투쟁의 사례도 있었다.

교육과 실업 등에 걸친 실력의 양성을 통해 국권의 회복을 꾀하려는 자강운동 역시 을사조약을 계기로 한층 활발해져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들과 학교의 설립이 잇따르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2월21일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를 공포하고, 초대 통감에 이토를 임명한 데 이어,

1906년 1월 31일 주한 일본 공사관을 비롯한 각국의 영사관을 철수하고,

 전국 13개소에 이사청을 설치하는 등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공사에 착수했다.

또한 조약에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만을 관리하기 위해 경성에 주재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1906년 3월 2일 통감으로 부임하자마자 한국의 유신을 위한 시정개선의 자문에 관한 고종의 의례적 부탁을 들어 자신이 한국의 시정개선에 관한 주요급무들에 관해 각 대신들과 협의 결정하여 국왕의 재가를 거쳐 시행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906년 3월 13일부터 통감 관사에서 한국 정부의 참정 대신 이하 각부 대신이 참여하는 '한국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수시로 열어 이를 주재하면서 사실상 한국의 내정을 총지휘하기 시작했다


⊙ 을사오적   

1905년11월,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할 때 한국측 대신 중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을

'을사 5적'이라 한다.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이다.

일본은 청일 전쟁과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 강화하였고,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하고,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어 두 나라로부터 대한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러일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맺어 대한 제국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조선에 대한 서양 열강의 간섭까지 없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 일본군을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에 서명하게 하였다(1905.11.).

이 때 조약에 찬성하며 서명한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을 을사 5적이라고 한다.

이후 을사늑약에 반발하며 을사 5적과 일본 침략자 등을 처단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중국 하얼빈에서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1909),

나철, 오기호 등은 자신회라는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살해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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