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빈 성씨             2019.08.02.금요일,맑음

의빈 성씨(宜嬪 成氏);정조의 첫 번째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생모이다.

이름; 성덕임

생졸;1753년-1886년,

본관; 창녕

능; 정조와 함께 합장한 건릉(健陵)

가계도

   부; 청원부원군 김시묵

   모; 당성 부부인 홍씨


의빈 성씨는 정조의 첫번째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생모이다.

1762년(영조 38년)에 입궁했고  헌경왕후(경의왕후;헤경궁 홍씨)가 친히 길렀다.

1766년(영조 42년)에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사양했다.정조는 이를 받아 들였으나 후궁의 반열에 뒀다.

1780년(정조 4년)에 다시 승은을 내리자 거듭 사양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후궁이 되었다.

  두 번의 유산을 겪고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고,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인하여

1786년(정조10년), 창덕궁 중희당에서 만삭으로 사망했다.


본래 의빈궁은 칠궁에 있었는데

1908년(순 2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신위는 매안되었으나 제사는 원소의 예를 따랐다.


정조의 첫번째 후궁인 의빈 성덕임은 1753년(영조29년) 음력7월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성윤우는 본래 승지 한준증의 청지기인데 한준증이 사망한 뒤 홍봉한의 청지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한준증의 양자 한문홍 덕분에 한때 재령의 군수가 되었지만,

몹시 가난해서 쌀과 피륙을 위해 관청의 고직(창고지기)에게 이따금 궁색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7천 냥을 횡령해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고문 당했다.

곧, 혜경궁이 성덕임을 궁녀로 거두어 친히 길렀고 성덕임은 혜경궁을 모셨다.


1766년(영조 42년),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울면서 세손빈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며 죽음을 맹세했다.

궁녀가 승은을 거부하는 일은 죽어 마땅할 만큼 큰 죄지만 정조는 그 뜻을 받아들이고 재촉하지 않았다.

성덕임이 자라자 혜경궁은 정조를 지극하게 따르라고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1780년에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렸지만 거듭 사양했다.

이에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크게 꾸짖고 벌을 내리자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이고 후궁이 되었다.


1773년(영조49년) 봄, 당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였던 성덕임은 21세의 나이에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당시20세),청선공주(당시18세),궁녀 영희,경희,복연과 함께 국문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였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이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

정조는 "의빈의 붓글씨가 범상함을 넘어섰다"고 표현했다.


'이재난고'에 따르면 화빈 윤씨의 산실청을 1780년(정조4년)1월에 세우고 분만을 앞두고 있고,

궁녀(성덕임)도 임신한지 여러 달이 되었다고 한다.

'어제의빈묘지명'에서는 15년 동안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를 간택 하고나서 다시 승은을 내렸지만 거듭 사양했고, 이에 성덕임의 하인에게 죄를 꾸짖고 벌을 내리자 비로소 성덕임이 정조의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재난고와 어제의빈묘지명을 참고하면 정조는 성덕임에게 거절당한 1766년을 한 해로 셈하여 15년의

시간을 산정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덕임은 화빈 윤씨가 입궁한 뒤에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고 늦어도 그해 11월에는 임신 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아기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 유산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해 '이재난고'에 따르면 황윤석이 7월에 성씨(성덕임)가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해 실록과 일성록에도 해산 했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 유산한 것으로 간주 된다.

1782년 음력 4월 30일, 일성록에 간접적으로 처음 등장한 뒤, 그해 음력 8월 26일 자의 기록이 실록에 처음 직접 등장했다.

권초관은 본래 비빈이 해산할 때 권초례를 행하기 위한 임시 관직이다.

그런데 상의의 임신에 권초관을 임명한 것을 보면, 당시 정조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수빈 박씨 소생의 순조와 숙선옹주의 경우, 태어난 당일에야 권초관을 임명한 것과 비교해보면 매우 빨리 권초관이 임명된 것이다.

1782년,음력 9월 7일 인시(새벽 3시~5시), 성덕임은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



정조가 효의 왕후,원빈홍씨,화빈윤씨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서 나라에 근심이 깊은데 성덕임이 아들을 낳자 왕실과 조정에서는 홍복이었다. 해산 당일에 호산청(후궁이 아기를 낳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을 설치하였고, 음력 9월 13일에 호산청이 철수 되었다.

혜경궁은 성덕임이 문효세자를 낳을 때 자신의 친정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보내 도왔다.

 

궁중 여인은 대개 거처하는 처소에서 아기를 낳았다.

경종은 희빈 장씨의 처소 취선당에서 태어났고,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처소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이로 말미암았을 때 성덕임의 처소는 문효세자를 낳은 연화당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추정을 토대로 보면 당시 상의(정5품)였던 성덕임이 전(殿) 다음으로 높은 당(堂)에서 거처했다는 것은 성덕임이 정조에게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화당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 업무를 보던 선정전 동쪽에 있었다.

왕의 침전이자 집무실로 쓰인 희정당도 선정전 동쪽에 있었다.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중희당도 연화당 근처에 있었다.

성덕임은 정조실록에서 1782년 음력 12월 28일에 정3품 소용으로 품계가 올랐다.

반면 일성록에 따르면 1782년 음력 9월 7일에 "소용방에 공상하는 등의 일을 규례대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고 했고, 같은 해 음력 9월 15일 상정각에서 열린 차대(次對: 임금이 의정부와 삼사의 당상관들과 하는 정책회의)에서 정조가 ‘소용’이라고 칭했다.

그런데 그 날 성덕임의 오빠 성식이 정조에 의해 파면 당했다.


정조는 예전에 성식을 편전 앞문 밖에 불러서 성덕임과 왕자의 연줄을 타고 내통하면 극형으로 다스릴 것이라며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고 가르쳤었다.

낮은 벼슬에 불과한 어영청 군교 직위를 파면한 이유는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나타나 있는데 정치적인 문제였다. 성식은 당시에도 계속 유지 되고 있던 화빈 윤씨의 산실청 문제로 군문의 명령을 받고 호조 서리가 되었다.

1782년 음력 11월 27일에는 맏아들의 원자 위호(작위와 명호)가 정해졌다.

1783년 음력 2월 19일에는 의빈으로 승격 되었는데 이 때 빈호 '의(宜)'는 정조가 직접 정했다.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에는 옹주를 낳았다. 맏아들 문효세자 때처럼 해산 당일에 호산청이 설치되었고[26], 6일 뒤에 철수되었다. 그해 음력 7월 2일에는 맏아들이 3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정조의 차남 순조가 1800년(정조 24년) 음력 1월 1일, 11세가 되어서야 왕세자로 책봉된 것과 비교하면 무척 이른일이었다.[27] 그리고 의빈의 오빠 성식(成軾)과 이름 불명의 다른 오빠는 동궁의 내례가 되었다. 1786년이 되자 의빈이 또 임신 했다. 의빈이 왕세자를 낳기 전까지 왕실과 조정에서는 후사가 없어서 상당히 걱정했었다. 왕세자가 태어난 이후 계속 임신을 하고, 자식이 태어나자 의빈은 궁중에서 홍복이었다. 혜경궁이 복스러운 얼굴을 칭찬하고, 정조가 지극히 사랑하고, 효의왕후가 친애했다.


1780년(정조4년) 음 12월과 1781년(정조5년) 음력 7월에 임신 중이었지만 유산 했고,

1784년(정조8년) 윤달 3월 20일에 태어난 옹주는 같은해 5월에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음력5월12일에 경풍으로 급사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 임율이 옹주를 치료하는 중이었는데, 옹주가 죽자 임율이 장례를 치렀다.

이후 1786년음력5월3일에는 왕세자가 홍역 증세가 있어서 의약청을 설치했다.

5월6일부터 호전 되었지만 5월10일부터 다시 심해지더니 5월11일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사망했다.

1786년윤7월19일, 문효세자를 효창묘에 장사 지낼 때 정조가 그 자리에 있었다.

의빈 역시 문효세자의 생모로서 정조와 함께 효창묘에 있었다.


정조가 “부인의 마음이 약하여 칠정 증세가 있다.

자연히 5월 이후 중병에 걸렸고 이에 본궁으로 피접을 보냈다.”고 했다.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심리를 뜻한다.

이는 의빈에게 마음의 병이 있었는데 문효세자 사망 이후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의빈을 돈의문으로 나가게 하여 경희궁으로 피접을 보냈고,

윤달7월21일부터 음력9 7일까지 경희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지냈으니 의빈은 아무리 늦어도

윤달7월21일에는 피접을 떠났다.

정조가 1786년 음력7월25일에 혼궁에서 전작례를 거행하고 밤을 지냈는데,

의빈이 문효세자의 혼궁이 있는 태녕전에서 밤을 지새운 일화와 상응한다.

의빈은 혼궁에서 돌아가는 길에 처음 어지러움을 느끼고 쉬었으나 몸이 거북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조가 한 말을 보면 이전부터 몸이 좋지 못했다.

의빈이 경희궁으로 피접을 떠난 뒤,

정조는 병이 조금은 나았다고 생각해서 도로 창덕궁으로 돌아오게 했다.

음력9월7일부터 14일까지 정조가 경희궁에 거둥했다는 기록이 없는 점을 봤을 때,

의빈은 9월7일에 창덕궁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조의 기대와는 달리 의빈의 병은 급격하게 위중해졌다.

정조는 의빈이 깨끗하게 씻는 모습을 날마다 직접 가서 보고,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 항상 직접 검열하고,

약봉지와 약그릇을 모두 누워 자는 침실 안에 보관해 놓고 쓰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의빈은 음력9월14일,창덕궁 중희당에서 만삭의 몸으로 사망했다.


1766년부터 후궁의 반열에 둔 의빈이 사망하자 정조는 슬피 울부짖었다.

혜경궁은 정조가 슬픔과 걱정으로 귀한 몸을 손상해서, 정조를 위해 두려워하며 애를 태웠다.

조정에서는 정조를 위로하며 정조 본인 건강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같은 해에 문효세자,의빈,뱃속의 태아를 잃은 정조의 상심은 너무나 컸다.


정조는 의빈의 상례를 영빈 이씨의 규례대로 후정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분부했다.

하지만 그해 홍역이 유행할 때 비용을 절감해서 문효세자를 예장하고, 칙명을 전달하는 사신의 행사 때 영접하면서 많은 비용을 썼다.

더군다나 흉년까지 겹치면서 국고는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어렵고, 호조는 재력이 탕진 되었다.

그래서 의빈의 예장에는 규례를 따를 수가 없어서 도감을 설치하지 못하고 모든 비용을 절감 했다.

음력9월16일,중희당에서 의빈을 입관 하고 안현의 본궁에 빈소를 마련했다.

음력11월16일에는 영빈 이씨의 전례에 따라 궁(宮)과 묘(墓)의 제향이 정해졌고,

음력11 20일에 효창원 왼쪽 언덕 임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정조는  의빈의 무덤을 아들 문효세자의 묘 왼쪽 산등성이 임좌의 언덕으로 직접 정했는데

의빈과 문효세자가 죽어서나마 못 다한 정을 나누고 함께 있기를 바라서였다.

후궁 보다 후궁이 낳은 자식의 신분이 더 높고 숙종이 숙빈 최씨의 묘 자리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

근처로 정할 수 없으니 다시 정하라는 명을 내렸던 일과 비교하면 파격적이었다.

더군다나 의빈은 문효세자의 생모여도 엄연히 후궁이고 문효세자는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정조 뒤를 이어

왕이 될 국본이었다.

본래 효창묘(효창원) 경내에는 어머니 의빈의 묘가 함께 있었는데 100걸음 쯤 떨어져 있었다.

효창묘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로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했다.

효창묘 남쪽에는 하마비가 있었다.

본래 의빈묘는 곡장이 삼면으로 둘러져 있고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 쌍, 문인석 한 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뜻이 무색하게 일제 강점기 때 의빈의 무덤은 서삼릉 내 후궁 묘역으로, 문효세자의 무덤은 의빈 무덤에서 2 km 떨어진 의령원 앞으로 강제 이장 당했다.


1786년(정조10년)12월 1일, 정순왕후가 언문으로 하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정순왕후의 하교에 ‘궁빈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이라는 내용은 정순왕후와 의빈이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의빈이 사망했을 때 조정 안팎에서는 상당히 통탄해 했다.

 더군다나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라는 말도 실록에 남아 있다.

의빈과 혜경궁이 친밀하고 정순왕후와 혜경궁이 정적 관계였음을 말미암았을 때,

정순왕후와 의빈의 관계 역시 좋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정조는 의빈 사망 당시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는 말을 남겼다.

또, 같은 날 기록된 실록에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라는 부분이 있다.

의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정조는 의빈의 죽음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의빈이 당시 내관 이윤묵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이에 놀란 정조는 의빈의 치상소에서 바로 이윤묵의 목을 베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고,

귀양 보냈다. 그

러나 정조는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 자신이 항상 직접 검열하였으므로 독살일 리가 없다고 판단,

얼마 뒤 이윤묵을 풀어준다.

대신 이에 연루된 손용득을 친히 신문하여 손용득과 여종 악연을 귀양 보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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