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괄의 난       2018.12.23.일요일,맑음

반정을 명분으로 왕위에 올랐지만,인조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정공신 이괄의 반란으로 즉위 1년도

못돼 한양을 떠나야 했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내부 반란으로 도성이 점령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이괄의 도성 점령은 불과 며칠 만에 끝났지만,이를 기화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인조는 호된 시련과 굴욕을 겪어야 했다.


반정 직후 인종은 53명의 공신들을 정사공신에 책봉했다. 이때 반정군 대장을 맡았던 김류는 일등공신에

포함됐으나, 이괄은 반정 세력에 늦게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등공신으로
밀려났다..앞서 이괄은 1623년 반정군이 대궐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했을 때, 뒤늦게 도착한 김류에게 반정군의 대장직을 되돌려 주면서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겼다.

이에 거사에 성공한 이튿날 이귀가 인조 앞에서 이괄을 병조판서에 임명할 것을 제안하자,

이괄은 “김류가 늦게 왔기에 그를 베고자 했으나 이귀가 말려 시행하지 못했다.”라며 김류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인조가 마련한 모화관 회식 자리에서도 이괄은 김류보다 아래쪽에 자리를 배정받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처럼 거사를 일으키고 논공행상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괄은 여러 차례 불만을 드러냈다.

이듬해 이괄이 반란을 모의했다고 고변한 문회 등은 “이괄이 거사한 날 집에 돌아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라고 말했다.” 하고 밝혔다.

불만이 쌓여 가던 이괄은 1623년 5월 변방 수비를 맡기 위해 평안도 영변으로 떠났다.

당시 압록강 너머 후금이 세력을 펼치자,숭명배금 정책을 내세운 조선으로서는 북방 경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이었다. 인조는 도원수 장만에게 수시로 후금의 동태와 경비 상황을 보고받았고,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당시 공석이던 부원수 자리에 이괄을 임명하면서 평안 병마절도사를 겸하게 했다.

당시 장만은 인조에게 부원수 후보로 이괄과 이서 두 사람을 추천했으며, 결국 이괄이 낙점을 받았다.

장만은 지원부대 5,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주둔하고, 이괄은 평안도 토병(土兵) 및 전라도에서
차출된 부방군(赴防軍) 1만 2,000명, 항왜(降倭, 왜란 때 항복한 일본 군인) 130여 명을 휘하에 두고 영변에 자리 잡았다. 영변의
위치로나 군사의 규모 및 수준으로나 이괄이 사실상 변방 수비의 실질적 책임자였다. 이괄은 부임 이후 군사를 훈련시키고, 성채를 보완하는 등
경비를 강화했다>그러던 중 조정에서는 이괄 등의 반란 모의에 대한 고변으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인조 2년인 1624년
1월, 문회와 이우(李佑), 정방열(鄭邦說) 등은 “이괄과 기자헌, 한명련(韓明璉), 현즙(玄楫), 이괄의 아들 이전(李栴),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 등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라고 고변했다. 이에 이귀와 최명길(崔鳴吉) 등은 이괄을 삭탈관직하고 하옥시켜 국문을 해야 한다고
인조에게 여러 차례 청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괄은 충의스런 신하인데 두 마음을 품었을 리 없다. 부원수의 직책은 이괄이 아니면 맡을 수
없다.” 하며 이를 거부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기자헌을 비롯해 역모 혐의가 있는 40여
명을 하옥시켜 국문을 진행하고, 이괄에 대해서는 일단 불문에 부치되, 그 아들 이전을 잡아들여 조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 이전은 아버지와
함께 영변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인조는 금부도사 고덕률(高德律), 심대림(沈大臨), 선전관 김지수(金芝秀), 중사 김천림(金天霖) 등을
영변으로 보냈다.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이괄은 아들이 잡혀가면 역모로 몰려 죽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영변을
찾아온 금부도사 일행을 죽였다. 그는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 남자가 어찌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겠는가.”라며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 즉위 10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이괄의 반란 소식을 듣고, 기자헌과 현즙 등 37명을 역모 혐의로 모두 처형했다.
이괄은 주변의 수령들에게 “도성에 변고가 생겨 구원하러 간다.” 하고 속인 뒤 군사들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했다. 역모 혐의를 받았던 구성 부사 한명련도 자신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를 죽인 뒤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개천을 거쳐
강동, 황주, 수안, 평산, 개성으로 진격해 한양에 이르렀다.반란군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은 장만과 부체찰사 이시발(李時發)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중간에서 막도록 했다. 하지만 반란군이 경비가 허술한 샛길만 골라 신출귀몰하게 이동하는 바람에 정부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연전연패하였다.
장만이 “적이 교활하게 샛길로 출몰하여 위치를 종잡을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반란군과 정부군이 처음 접전을 벌인 곳은 황주 부근의 상원이었다. 이곳에서 정부군은 반란군이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하자 방심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선봉장 박영서(朴永緖) 등은 사로잡혀 죽음을 맞았다. 항왜를 앞세운 1만여 명의 반란군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예성강 상류인 평산 마탄에서 잠복 중이던 정부군을 급습해 무찌르고 방어사 이중로(李重老), 이성부(李聖符) 등을 죽였다. 정부군
중에는 강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고, 나머지는 모두 반란군에게 항복했다. 정충신(鄭忠信)이 이끄는 군사들이 정부군에 합세하려고 뒤늦게
도착했으나, 반란군이 여러 장수의 머리를 베어 실어 보내자 모두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반란군은 이어 개성을 지나 임진을 지키던 정부군까지 기습
공격으로 격파하고 벽제로 나아갔다.다시 조정에서는 정부군이 마탄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밤에 대신들이 모여 인조에게 도성을 떠날
것을 청하였다. 결국 인조는 며칠 후 비빈, 대신들과 함께 공주산성(公州山城)으로 피란을 떠났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그다음 해에 내부
반란으로 왕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자, 백성들은 충격을 받았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는 곧 조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미 인조가 즉위한
직후부터 공신 집단의 국정 농단이 심해 민간에서는 ‘광해군 때의 북인과 다를 게 없다’라는 내용의 풍자적인 노래가 유행하던 터였다. 한 예로
반란군에 맞서 도성을 방비할 군사를 급히 모으는데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사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달아나고 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은 2월 10일 한양으로 입성했다. 영변에서 군사를 일으킨 지 19일
만이었다. 이괄은 우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성 곳곳에 방을 붙여 생업에 종사하게 했고, 일반 백성들도 이괄의 무리를 환영했다. 이괄은 이어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옹립했다.</P>
<P class=desc_section>이즈음 이괄의 뒤를 쫓아온 장만과 정충신, 남이흥(南以興)이 각지의 관군 연합군을 이끌고 안현(鞍峴,
길마재)에 도착해 진을 쳤다. 그러자 이괄은 군대를 두 곳으로 나눠 이들을 포위 공격했으나, 관군이 지형상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는 바람에 이괄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이괄은 야음을 틈타 부상당한 한명련을 비롯해 패잔병 수백 명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광희문)을 통해 도성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관군의 추격으로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괄은 40여 명을 이끌고 광주를 거쳐 이천 묵방리에 이르렀다. 이날 밤 반란군의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 등은 이괄과 아들 이전, 한명련 등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투항했다.</P>
<P class=desc_section mouseX="340" mouseY="3158">이렇게 해서 이괄의 반란은 평정됐다.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장만과 정충신, 남이흥 등 32명을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봉했다. 하지만 역모 혐의를 받고 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달아나 인조 정권의 부당성과 친명 외교를 거론하며 조선 침략을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3년 뒤 조선은 또다시 전란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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