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항복과 이덕형,이원익        2017.10.15.일요일,맑음

오성 이항복; 생졸; 1556~1618
한음 이덕형; 생졸 1561~1613)         

인품이 넉넉하고 남다른 우국충정과 도량을 지닌 명신이요, 외교가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인사들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풍파에 휩쓸리고 비난에 시달렸으나, 이덕형만은 드물게도 입방아에 별로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인물이었다.그가 태어날 때는 나라가 정치적 ·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위로는 연이은 사화가 일어나고 뒤이어 당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 척신(임금과 성이 다르지만 한집안인 신하) 윤원형이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며 날뛰고 있었다.

아래로는 각지에서 지방 호족들이 난리를 일으켰고 도적들이 제멋대로 행동했다.
나주의 토호 김응란과 황해도 의적 임꺽정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역사인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은 어릴 적에 동화나 만화를 통해 오성과 한음의 따뜻한 우정과 유머러스한 장난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오성은 이항복, 한음은 이덕형을 가리킨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항복이 이덕형보다 다섯 살 위였으니 형 뻘이다.

이들은 포천 출신으로 함께 서당에 다녔으며 이항복의 장인이 된 권율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런 탓으로 두 사람은 벼슬길에 나와서도 뜻을 같이해 우정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정치적 노선의 지향도

달리하지 않았고 명나라 외교에도 힘을 보탰다.

이덕형이 벼슬자리에 나와 활동하던 시기, 짧다면 짧은 50여 년 동안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동 · 서의 치열한 당쟁, 정여립의 모반 사건, 대전란인 조일전쟁 등이 연이어졌다.

또 그가 죽을 무렵은 임진왜란(조일전쟁) 뒤에 필연적으로 유발된 사회 전반의 파탄, 광해군의 정치적 마찰, 대외적으로는 명나라가 꺼져 가고 후금이 강력하게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러니 이덕형이 산 기간은 조선조 중기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이덕형은

1580년(선조 13) 20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급제하며 관계에 몸을 담았다.

 

교리 · 대사성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판 겸 대제학이 되었다.

 

31세의 젊은 이덕형은 이때부터 정치가로서의 수완과 외교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동래를 함락시킨 뒤, 파죽지세로 경상도를 휩쓸며 북상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 측에서는 조정의 화전 교섭 제의를 다 물리치고 이덕형만 만나고 싶어 했다.

한양의 벼슬아치들이 허겁지겁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을 때,

 

이덕형은 길을 남쪽으로 돌려 전선에 나가 있었다.

그는 밀양에 내려가서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일본의 배신을 힐책하며 물러 나왔다.

 

일본군은 평양성 함락을 앞두고 또 한 차례 이덕형을 만나자고 제의했다.

이덕형은 종자 두어 사람만을 데리고 회담장소인 임진강 한가운데로 나갔다.

 

일본 측에선 안면 있는 승려 겐소와 야나가와 등이 나와서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비켜 주고 협조해 달라고 강요했다.

 

이덕형은 조금도 굽힘없이 한마디로 거절하고 물러 나왔다.

그는 이때 일본군이 우리나라와 강화를 한다고 해서 물러가지는 않을 것을 간파했다.

 

그는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선조를 정주까지 호위하여 따랐다.

그는 이항복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이덕형은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로 건너갔다. 명나라는 국내의 사정으로 구원병 보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덕형은 명나라가 결국은 구원병을
파견할 것이라고 판단하며 온갖 설득 끝에 친조파인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움직여 끝내 구원병 파견을 성공시켰다.명나라 총대장
이여송의 부대가 압록강에 당도하자, 이덕형이 접반관이 되어 접대를 맡았다.

그는 오만무례한 이여송을 여러모로 달랬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평양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여송이 평양 탈환작전을 벌일 때, 이덕형은 또 다른 막역한 친구요 선배인 평양관찰사 이원익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탈환작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평양 탈환의 성공은 전란 중 처음 기록한 조명 연합군의 승리였다.

 

이덕형은 1593년 병조판서가 되어 전쟁을 지휘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인 1598년에는 38세의 장년으로 우의정에 승진했고, 이어 좌의정에 역임했다.

 

1601년에는 경상 · 전라 · 충청 · 강원도의 사도도체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행하면서 민심
수습에 나섰다.난이 끝난 뒤에 온 나라에 역질과 기근이 돌아 전쟁에 시달린 민중이 괴롭힘을 당했고, 풍기는 극도로 문란해져
있었다. 이때를 당하여 그는 사도의 도체찰사로서 민중의 구호사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지방군대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난이 끝난 뒤
호성공신(扈聖功臣, 난에 선조를 호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들)이 문서에 훈공이 기록될 때, 그의 친우인 이항복과 이원익은 1, 2등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나 그는 애써 사양했다. 사실 그는 잠시 왕을 호종했을 뿐 그의 뜻은 언제나 전선을 달리거나 명나라에서 교섭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할 일을 다 했을 뿐, 훈공이 기록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BR><BR>다른 각도에서 보면 호성공신을 서둘러 녹훈한
것은 순서도 틀렸고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 선조 자신이 북쪽으로 파천할 때 민중은 돌을 던지면서 저항의 기세를 보였다. 전선으로 달려가야 할
벼슬아치들이 북쪽 안전지대로 도망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도 난중에 임금을 모셨다고 하여 내시들을 공신으로 올리면서도 정작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죽어 간 장수들은 뒷전으로 밀어 놓았다.

 

이덕형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마침내 1602년 이덕형은 정치가로서나 벼슬아치로서 최고의 영록인 영의정이 되었다. 이덕형은 4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전쟁으로 피폐된 나라를 바로잡기에 힘썼다.

 

그는 인맥으로는 남인 계열에 들었으나 당색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정직하고 바른 정사를 폈다. 이 과정에서 친구 이항복의 협조가 그를 받쳐 주었다. 그 뒤 이덕형은 잠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그는 광해군이 여러모로 빚어내는 마찰을 몸소 겪으면서 관계에 있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덕형은 마침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벼슬이 박탈되는 삭직(削職)의 아픔을 겪었다. 1613년 대북파의 충동에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모하려 했다. 이덕형은 이원익 · 이항복과 함께 이를 크게 반대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는 곧장 행장을 꾸려 양근(楊根)에서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그가 살던 시대는 힘든 일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순탄한 길을 걸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는 현관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온갖 현관을 지냈으며, 탁월한
지도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주위는 늘 그에게 심복했고, 권모술수형 정치가가 아니면서도 당시 세상은 늘 그의 편에 서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인간적 풍모와 원만한 성품 탓이었다. 친구 이항복이 명신 권율을 장인으로 두어 부러움을 샀다면, 이덕형은 영의정을 지낸 북인 이산해(李山海)를
장인으로 두었다. 관계에서는 이산해의 보이지 않는 권위에 힘입은 바도 컸다.“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임진왜란 때는
뛰어난 선비들이 널려 있었다.

 

임진왜란을 치러낸 첫째 공로자로 서애 유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을 꼽는다. 그 다음은 3리(李)라고 한다. 3리란
이원익 · 이항복 · 이덕형을 말한다. 이 세 사람은 각기 개성과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 가운데 이원익이 맏형이었다.

 

 

이원익(1547~1634)은 체구는 작으면서도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솔직 대담성, 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항복(1556-1618)은 기지와 해학, 재기발랄함과 명민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을 사랑하고 인정이 넘치는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이덕형(1561~1613)은 위풍이 당당하고 언변이 뛰어났으며, 언제나 상대에게 호감을 주면서 상대를 압도했다.

이 세 사람은 남다른 교분을 지녔고, 또 영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이원익은 오리(梧里) 정승으로 통했고, 이항복은 오성(鰲城) 대감으로 불렸다. 이덕형은 이항복과는
한 스승 밑에서 함께 학문을 닦은 벗이었다. 이덕형은 세 사람 중 나이가 제일 적으면서도 먼저 높은 벼슬을 얻었고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은 이덕형이 죽은 5년 뒤, 인목대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북청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이원익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홍천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뒤 영의정에 추대되었고,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고 난 뒤 죽었다.

세 사람의 나이는 이원익,이항복,이덕형 순이었으나 죽은 연대는 이덕형,이항복,이원익 순이다.

그들은 인생관과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은 같았으나 태어나고 죽은 순서는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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