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     2015.8.17.월요일 맑음

생졸;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선조 시대의 명장,


아버지는 이정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로 변수림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고,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12대손이다.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내며,

5대조인 이변은 영중추 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를 지냈다.할아버지 이백록이 조광조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는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어머니 변씨는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이순신은 희신,요신의 두 형과 아우 우신 모두 4형제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 되던 해에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1576년 선조 9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피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여 판결에 불복하면서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첫번째로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로 승진,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왜침에 대비하여 좌수영(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

    대처하였다..

1592년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국기일로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 우수사 원균으로 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 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 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경상 좌수사 박홍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동래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접전을 회피하자 왜구는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이순신은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고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1592년4월29일 수영 앞바다에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었다.

1592년5월2일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기함에 승선하였다.

1592년5월4일 출진을 명하니,규모는 전선 24척,협선15척, 포작선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1592년5월6일 한산도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3척과 협선 2척과 연합함대를 조직하였다.

1592년5월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날 무렵 적선 30여척 있다는 연락이 왔다.

     옥포에 정박중인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외선 26척이 격파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1592년5월8일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1592년5월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 앞바다에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사천엔 왜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다.바다로 유인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 등이 부상하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1592년6월2일 왜선이 당포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 수군장 가메이와 구루시마가 인솔하는 대선 9척,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당포해전이다

1592년6월3일 이순신은 창신도를 떠났다.

1592년6월4일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과 합류하였다.

1592년6월5일 전선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있어 바로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에는 왜의 대선9척,중선4척,소선13척이 정박 중이었다.조선수군은 적선을 포위하였다.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에 승계되었다. 

1592년7월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 해상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

    하였다.

1592년8월14일 왜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에는 적장 와키사카의

    대선 36척,중선 24척,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아 전투하기에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몇척의 판옥선으로 왜군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의 가신 와키사카사베에·와타나베등이 전사하였다.한산대첩이다.

    한산대첩의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에 승계되었다.

 

한산 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 작전을 하려던 구키,가토(가등청정) 등의 일본 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그는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 회의를 하여 부산포 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영도)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 정운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그는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로 진을 옮기고,이어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군비 확충,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 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 회담이 결렬 되자,

본국으로 건너 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소서행장)의 부하이며 이중 간첩인 요시라 라는 자가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가토(가등청정)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에 들어온 뒤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 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 당하게 되었다.

또,그 중에서도 경상 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 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 때 그는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 때,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자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 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 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초계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대신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만이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은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 해전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 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목포)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11월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그는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도 그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정인보는 '이충무공 순신 기념비'에서 이수신은 명장보다도 성자다.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의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 무결한 인물이었다.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사후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그가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시조'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 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전사 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 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여수의 충민사,아산의 현충사 등에 제향하였는데,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때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33년에에 현충사가 건립되었다.

그 뒤 일제 강점기 때에 동아 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이다.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의 '이순신전'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참고로 이순신의 3대첩은 한산도대첩.명량대첩.노량대첩이며

거북선이 최초로 출현한 전투는 사천 해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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