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의 정읍 발언        2019.11.15.일요일,맑음

1946년6월3일,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발언이다.


1945년12월28일에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따라 미.소 공동위원회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결의되었다.한반도 문제는 미국,소련.영국.중국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를 거쳐야 했고,

국내에서는 신탁통치를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미군정의 지원 하에 '좌우 합작 운동'이 진행되었지만,좌익과 우익 모두의 만족을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 또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교섭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는 상황과 맞물려 단일 정부 수립이 아닌 남한

단일 정부 수립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은 1946년4월6일,언론을 통해 제기되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지연되자 미군정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는 남한 단독 정부를 본국에 제의했는데

1946년4월7일,미국부가 '남한단정론'을 부인하는 성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일단은 수그러들었으나,

   남한단정론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계속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교섭이 결렬되자 남한단정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46년5월12일에 열린 독립전취국민대회에서 김규식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면 우리 손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우리 손으로 세운다는 정부'가 어떤 정부냐를 놓고 관심이 집중되자,김규식은 통일 정부로 해명하였고,

   이승만 역시 단독 정부 수립은 불가능하다고 일축하였다.

   우익 지도부에 의해 '남한단정론'이 부인된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1946년4월15일부터 지방을 순회하고 있었는데,

지방 순회를 통해 신탁통치의 반대를 역설하고 자신의 기반을 확대하려 한 것이다.

그러던 중 이승만은 1946년6월3일,전북 정읍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이 보이지 않고, 통일 정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우리는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을 몰아 내도록 세계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946년6월5일, 전북도 이리(익산),6월 25일 경기도 개성 방문에서도 이어졌다.

앞선 5월의 남한단정론을 부인하던 입장에서 선회하여 남한단정론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1946년6월4일,전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남조선만의 정부란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생각이며, 일반 민중이 희망한다'는 요지의 답변을 하였다.

정읍 발언을 대표로 하는 이승만의 남한단정론에 대해 좌익,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익, 중도파 모두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의 일부가 지지하였다.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고 좌.우합작을 통한 정책을 수립한 상황이었으므로,

이승만의 남한단정론에 반대하였다.

이처럼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통한 남한단정론은 각계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였으나,

이승만은 1946년11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직접 미국으로 가 단독 정부수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벌이는 등 점차 정부 수립 방안의 하나로 자리잡아 나갔다.

이와 같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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