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완용             2019.09.19.목요일,맑음

이완용(생졸;1858.6.7-1918)은 을사5적으로 대한제국 외부 대신서리,의정부 참정대신,내각 총리 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다.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대대로 노론 계열에 속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완용은

6대조 이재는 숙부 이만성이 신임사화(경종1년,1722년-1723년) 때 노론 계열로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인에 은거하며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11세때 먼 일가인 판중추 부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다.

이호준은 명문가의 노론파의 후손이고 흥선대원군과 가까웠다.서형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사위이다.

이러한 가정 환경 아래 13세때 명문 가문인 조병익의 딸과 혼인하였다.


20세때까지 전통적인 한학 교육을 받았고 25세때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계로 진출하게되었다.

1886년4월,규장각 시교에 임명되고 홍문관 수찬으로 6품의 직에 올랐다.


임금 가까이에서 지내며 민비의 총애를 입고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

그 일환으로 민종식,이준용 등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갑신정변의 잔당인 신기선 등을 국문하여 그 세력을 뿌리 뽑을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구한말 미국과의 교류가 긴요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1887년 3월,육영 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받았으며,이를 계기로 한국 최초 주미 공사

   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1887년9월,주미 참찬관으로 임명되었고 전권공사 박정양,서기관 이하영,이상재 등과 함께 주미공사관

   외국인 서기관 알렌(한국 이름 안연)의 인도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1년여간 체류하면서 미국의 독립 사상과 근대 문명의 발달을 경험하는 한편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이라는 세계 흐름과 힘의 논리를 인식하게 되었다.

1888년12월,임시 대리 공사로 재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890년10월, 귀국하였다.이후 대미외교의 1인자로 친미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0년,호조참의 좌부승지,내무부 참의가 되고

1891년,성균관 대사성,형조참판,동부승지,내무 협판 등을 지냈다.

1892년,이조참판,

1893년,한성부 좌윤,공조 참판,외무협판 등을 두루 거쳤다.

1895년5월,친미 친러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학부대신에 임명되었고 이채연 등

   친미파와 함께 알렌의 이권 획득 요구에 적극 협조하였다.

1895년10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이윤용,이하영 등 친미파 인사들과 함께 미국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친러파 인사(김홍륙,이범진 등)들과 공모하여 ‘춘생문 사건’을 일으켜 정권

   탈취를 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96년2월11일,알렌의 후원하에 이범진 등 친러파와 공모하여 ‘아관파천’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이후 사건 주모자들은 친일파 세력을 몰아내고 내각의 요직을 장악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시작한 신내각에서 외부,학부대신과 농상공부 서리와 군부대신 겸 경무사 등 5개

   직책에 동시에 임명되었다.

1896년7월부터 1898년 초반까지 독립 협회에서 활동하면서 위원장,부회장 및 회장직을 맡았다.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자주 독립을 외치며 신정치 운동을 표방하는 데 앞장섰고, 고종의 환궁 운동을 전개

   하여 실현시켰다. 이후 러시아 세력의 경계와 압력을 받고 학부 대신에서 물러나

1897년9월,평남 관찰사로 전임되어 외직으로 밀려났다.

1898년2월,독립 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1898년3월11일,전북 관찰사로 전임되면서 실질적인 활동은 중지되었다.

1898년7월17일,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책임을 물어 제명 처분되면서 공식적으로 완전히 독립협회

   에서 떠났다.

1898년3월,전북 관찰사 재직시 직무태만으로 감봉 처분을 당하였고 거액의 민재를 착복하여 관찰사직에서

   파면 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1898년12월,징계 특면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그 후 외직에서 지내다가

1901년2월,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관계로 복귀하였다.이후 국내외 정세 변화와 함께 러일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였다.

1905년9월,학부대신이 되어 9년만에 다시 대신의 자리에 앉았다.

1905년11월17일,이토히로부미(이등방문)가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키 위해 대신들을 위협하며 조약체결을

   강요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이완용은 ‘을사5적’의 한 명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

   으로 떠받들었다. 조약 체결에 앞장선 공으로 의정대신 임시서리 및 외부 대신서리에 임명되었다.

1907년,의정부 참정대신으로 농상공부대신서리·광산 사무국 총재까지 겸하였다.

1907년6월,이른바 내각관제가 공포되자,내각총리대신으로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였다.

1907년7월, 내각 총리 대신으로 있으면서 일제의 요구에 부응하여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 황제의 강제 양위를 주도하였다.

1905년7월24일의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7적’ 가운데 한 명으로 지탄을 받았다.

   조약체결 직후에는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 시켰다.

1907년,의병장들을 중죄로 처벌하고 미체포한 의병 부대 지휘관들을 체포할 것을 순종 황제에게 요구했다.

1909년7월12일,통감 소네아라스케와 함께 ‘한국 사법 및 감옥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에 내각 총리대신의

   명의로 서명함으로써 사법권을 일본에 위임하였다.

1909년7월26일, ‘한국 중앙 은행에 관한 각서’를 조인하여 중앙 은행의 운영과 권리에 대한 집행 및 감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도록 하고 한국 재정 및 경제권을 양도하는 데 앞장섰다.

   이와 같은 매국적 행위로 인하여 독립 운동가들의 암살 1급 대상자로 지목되었다.

1909년12월22일,서울 종현 천주 교회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12월17일 사망)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가 독립 운동가 이재명의 피습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으나 살았다.

1910년8월3대,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 체결 협상을 벌이고,

1910년8월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 황제를 압박하여 합병 조칙을 받아냈다.

   이에 마침내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게 넘어가고 ‘경술9적’ 중 1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10월7일,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합병에 관한 공로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고,

1910년10월부터 1912년 8월까지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부의장을 지내면서 총독의 자문에 응하였다.

1916년8월4일,'매일신보'에 왕세자의 혼인과 관련하여 “병합하여 한 국가가 된 후에는 황족간의 결혼은

   당연한 일”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내선 융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19년3월1일,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게재하여 만세 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하고

   저항 운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1920년 후작이 되고( 사후 손자 이병길이 작위를 물려 받음) 농림 주식회사 고문·교육 조사위원·총독부

   산업 조사위원·조선 미술 전람회 심사원·조선사 편찬 위원회 고문 등의 명예직을 두루 겸하며 일제의 식민

   정책에 협력하였다.

1924년4월, 항일운동에 대항하여 일선융화를 내걸고 결성된 친일 단체 '동민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2월11일,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앓던 해수병이 악화하여 사망하여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다.


이완용은 정치 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이었다.

일제에 협력한 공로로 1907년10월,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고,

한일 합병조약 체결 직후인 1910년8월, 금척대수장을 받았다.

1911년1월,15만원의 은사 공채를 받았고,

1912년8월,합병에 대한 공로로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11월,다이쇼 일본왕 즉위시 참석한 공로로 대례 기념장을 받았고,

1918년4월에는 정3위에 서위되고 사망 후 정2위와 대훈위 국화대수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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