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익        2019.0101.화요일,맑음

이원익; (李元翼, 1547~1634년)

조선 시대 중기는 안팎으로 정세가 급변하는 격동의 시대였다.

특히 선조, 광해군, 인조에 이르는 시기는 붕당의 시작과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 인조반정 등으로 나라 안팎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때 세 명의 왕 모두가 영의정으로 발탁한 인물이 바로 이원익이다.

이원익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중심을 잡고 바른 정치를 펼쳤으며,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 이르러서도 청렴함으로 높이 칭송받은 인물이다.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 태종의 아들 익령군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함천 부수를 지낸 이억재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 관원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1573년(선조 6)에는 성절사 권덕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두루 거치고 황해도 도사를 지내다 이이의 추천으로 내직인 정언으로 발탁

되었다.

1583년(선조 16)에는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도승지 박근원과 영의정 박순의 불화로 인해 승정원이 탄핵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파면되기도 했다.

1587년(선조 21)에는 이조 판서 권극례의 추천으로 안주 목사가 되었다.

안주 목사로 부임해 지방의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이원익은 그 후 중앙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이원익이 재상의 반열에 올라 큰 뜻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였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평안도 순찰사가 된 이원익은 왕의 피란길을 호종하고,

명나라 군사와 함께 조선군을 지휘해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헌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우의정, 4도의 도체찰사, 중추부사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조와 인조 조에도 영의정이 되어, 그는 세 왕조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으로 기록되었다.

이원익은 선조 때 대동법 실시를 건의했고, 불합리한 조세제도와 병역제도를 시정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란길을 호종했으며, 중앙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선조 조부터 인조 조에 이르기까지 세 임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다.

 

이준경과 이이가 알아본 인재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이원익을 장차 크게 쓰일 인물로 점찍은 사람이 있다.

당시 영의정이던 동고 이준경이다. 이준경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 이준경의 눈에 이원익에게 한 가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건강이었다.

이원익은 키가 3척(1미터 내외)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작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을 때는 몸도 약해서 관직에 오르기 전에 몸부터 챙기라는 주위의 걱정을 꽤 들었던 모양이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이준경이 이원익을 왕에게 추천하면서 몸이 허약해서 걱정이라고 하니 왕이 산삼을 내려 병을 고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원익을 직접 본 왕이 그 작은 키를 보고
“괜한 산삼만 내다 버렸구나.” 하고 웃었다고 한다.

 

1569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이원익은 승문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 유성룡이 그를 자주 찾아와 교류했다.

이원익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는데,

유성룡은 그런 그가 믿고 의지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유광익이 쓴 '풍암집화'에는 두 사람의 사람됨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이원익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이든 최선을 다했다.

1574년(선조 7) 황해도 도사로 부임했을 때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처리를 잘해서

나이 많은 아전들도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마침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는데, 젊은 도사 이원익을 믿고 일을 맡겼다.

이이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이가 서울에 들어와 숙배한 뒤에 부임해 상소하면서 도내의 폐막을 전부 개혁하겠다고 청했다. 그런 뒤에 학교를 크게 수리하고 학범을 신명하며, 탐활한 자를 제재하고 선량한 자를 정표하며, 백성의 아픔을 보살피고 군정을 닦으니 군사들과 백성이 감열했으나, 그가 건의한 것을 조정이 많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유감으로 여겼다.

이때 도사 이원익은 명망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서관으로부터 막직에 보직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시했으나, 이이는 한 번 보고 그의 재주를 알아 마침내 정무를 맡겼다. 

선조 7년 10월 1일 이때의 인연으로 이이의 추천을 받은 이원익은

이듬해인 1575년(선조 8) 중앙 관직인 정언이 되었다.

이원익은 1587년(선조 20) 안주 목사가 되었다. 당시 황해도 안주 지방은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백성의

삶이 피폐해져 있었다. 그런데 안주는 관방의 중요한 지역이라 조정에서는 명망 있는 중신을 보내어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안주가 워낙 변방이다 보니 명관들이 모두 가기를 꺼려했다.

이때 이조 판서 권극례가 이원익을 추천했다. 당시 이원익은 1583년에 우부승지로 있다가 도승지 박근원과 함께 파직된 후 복관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안주에 부임한 이원익은 기근을 해결하고 민생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안주에서 활약한 내용에 대해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원익이 단기로 부임해 먼저 조곡 1만 석을 감사에게 청해다가 종자를 주고 경작을 권했더니 가을이 되자 큰 풍년이 들어 조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찼다. 드디어 군정을 변통하고 잡역을 감면해 몸소 변진에
양세를 납입하게 해 조등의 폐단을 없앴다.

안주는 서로에서 누에치기를 힘쓰지 않았다. 이원익이 백성에게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니, 사람들이 이를 이공상이라 불렀다.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했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해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자주 포상을 받아 품계가 올라 조정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렀으니, 공보(公輔)의 명망은 여기에서 기초한다. 비록 작고 병약했으나 그의 능력을 알아본 여러 명관들 덕분에 이원익은 조정에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다 이원익이 재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크게 명망을 얻지 못하다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해 주목을 받는 사람이 있다. 이원익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하지만 이원익은 이미 준비된 인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중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원익은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관서의 병마를 감독했다.

같은 해 5월, 선조가 영변으로 몽진하고 나서는 평양성에 남아 성을 방어했다.

그리고 6월에는 군병을 모집해 적진을 공격하는 등 전공을 세운 후에 평안 감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다.

1595년(선조 28)에는 우의정이 되어 처음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성주에 주둔하며 산성을 수축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군사를 지휘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이원익은 충주에 주둔하며 명나라 장수인
경리 양호의 군량을 조달했다. 한편 이원익은 모함으로 파직되었던 이순신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없으면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었고, 이원익은 한산도까지 직접 찾아가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듬해 좌의정에 오른 이원익은 명나라 장수 양호의 변무사로서 연경에 가서 주본을 올렸다. 중국어 실력이 뛰어났던 이원익은 명나라의 장수와 사신을 맞아 이야기를 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명나라의 관원들이 이를 보고 감탄했다.

 

이원익은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넉 달 만에 사직했다.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함께
재상을 지낸 유성룡이 이이첨 등에게 탄핵을 받았을 때 그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9월, 다시 영의정이 되어 조정에 돌아온 이원익은 유성룡과 같이 어진 이를 등용하고 홍여순, 정영국, 채겸길과 같이 불초한 사람들은 물리쳐야 한다고 왕에게 청했다.

유성룡은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자신을 지키고 혈성으로 나라를 걱정했는데, 이제 전하께서 홍여순 등의

참소를 좇아 어진 이를 끝까지 쓰지 못하고, 일시에 착한 무리를 유성룡의 당이라고 해 멀리하고 배척하시니, 신은 사림의 화가 이를 좇아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임금의 위엄이 서지 못하여 정영국과 채겸길 등이 감히 간사한 언론으로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므로, 시비가 밝지 못하여 행동거지에 잘못된 점이 많고 사특함과 바름이 분명하지 못하니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홍여순은 임국로의 무리이니, 만약 이런 사람을 임용한다면 반드시 국가의 화가 될 것입니다.

이는 당색에 구애받지 않은 공평한 인사에 대해 진언한 것이다. 이원익은 전쟁 중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나 당쟁으로 어지러운 조정을 안타깝게 여겼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북인 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남인과 서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도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심희수 등의 원로들은 조정 대신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이원익은 남인의 영수로서 광해군 대의 대북 정권에서 영의정을 지냈고, 서인 정권인 인조 대에도 영의정을 지냈다. 물론 특정 당파에 권력이 집중되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상호 비판과 견제, 공존의 원리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따라서 관제 야당에 불과했던 남인이 영의정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것은 인심을

수습하기 위한 변통책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인물 그 자체로 본성이 정직하고 청렴해 당파를 막론하고 신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사실 그는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형성될 때 동인 계열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지만 처음부터 당색을 크게 드러내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기 사람을 챙기려고 인사권을 남용하거나 경쟁자를 공격하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지도 않았다.

이런 공명정대한 태도가 선조에서 광해군으로, 광해군에서 인조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대에 원로대신으로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물론 그 역시 상황에 따라 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오히려 화를 입지 않고 오랫동안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는 실록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선조 조에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직하고 여주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임해, 영창의 옥사에 모두 간여되지 않았다.

 

당쟁의 격랑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원익은 소신껏 바른 정치를 실천할 수 있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선혜청을 설치한 것도 그의 치적 중 하나이다. 그는 방납의 폐단을 없애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 줄 것을 왕에게 주청했다.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가로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을 설치해 매년 봄과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結)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해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 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 곁의 고을은 사객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해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과 조사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 

 

이원익이 끈질기게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한 것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다. 당시 대동법은 우선 경기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이러한 시도가 있었기에 훗날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조정 내에 만연한 붕당의 폐단을 비판했다.

조정에 붕당의 조짐이 30년 전에 일어났는데, 근래에는 그 풍습이 더욱 고질이 되어 인물의
현부는 분변하지 않고 자기 당이면 취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버리며, 논의의 시비는 따지지 않고 자기

당이면 가하다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불가하다 하므로 현우와 시비가 뒤섞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진용하면 그 진용된 자가 어진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그 당이기 때문이다.” 하고, 한 사람을 물리치면 그 물리침을 당한 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그 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며, 논의의
가부까지도 어느 쪽임을 가리켜 말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온 나라의 경·사·대부가 단 한 사람도 당목 가운데 들지 않은 자가 없어 피차가 서로를 시기하고 각기 혐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을 만나면 방황하며 담당하려 하지 않고 남의 일을 보듯 하여 국사를 어찌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리니, 이를 생각하면 진실로 통탄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한편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정권을 잡은 대북의 실세 정인홍과 이이첨 등은 왕의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제거했다. 그것도 모자라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까지 폐비하고자 했다. 이때 이원익은 광해군에게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광해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원익이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군부의 죄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건으로 이원익은 파직당하고 홍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역시 이원익의 명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큰 벌은 내리지 않았다.

 

이후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은 폐주가 되었다. 반정 공신들은 인목대비를 폐하고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이유로 광해군 역시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원익은 이에 반대했다. 자신이 한때 임금으로 섬겼던 사람을 죽인다면 자신도 인조의 밑에서 벼슬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소신있는 발언이었다. 결국 인조는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광해군에 대한 처리를 마무리했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의 자리에 앉혔다.

왕의 부름을 받은 이원익은 팔십대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인조는 이원익을 인견했다.

상께서 이르기를 “오직 경만을 의지하니 경은 모름지기 백관을 통솔하고 힘써 나를 도우라.
조정의 수백 년 종사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경의 보좌를 힘입어 위태한 조정이 부지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야 어찌 감히 조금인들 해이하겠습니까.

다만 근력이 부칠 따름입니다.” 했다.

세 분의 왕을 보필하고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운 천하의 이원익도 이제 환관의 부축을 받아 겨우 왕 앞에
나설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쇠해졌다. 인조는 노대신에게 궤장을 하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익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를 호종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세자와 함께 남쪽으로 가 전주에 주둔하는 등 끝까지 신하된

도리를 다했다. 이후 이원익은 몸이 늙고 병들어 더 이상 공무를 다할 수 없으니 퇴직하게 해달라고 왕에게 여러 번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결국 마지막에서야 퇴직을 허락했다.

1627년(인조 5) 가을이었다. 이원익은 이때부터 관직 생활을 접고 금천에서 여생을 보냈다.

후세 사람들이 이원익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은 그가 진정한 청백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검소했다. 뇌물을 주려는 자는 오히려 벌주는 청렴함을 자랑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인조가 퇴직한 이원익의 안부가 궁금해 승지를 보내 알아오도록 했다. 이 일이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상이 승지를 보내 이원익의 안부를 묻게 하면서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그의 기력은 어떻고,
살고 있는 집은 또 어떠한지 내가 자세히 알고 싶으니 일일이 서계하라.” 했다. 승지가 회계하기를 “이원익은 이미 극도로 쇠약해져 기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돌아앉거나 누울 때에도 꼭 사람이 부축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살고 있는 집도 몇 칸 초옥(草屋)에 불과해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했습니다. 대대로 선영 아래에서 살아오면서도 한 두락의 밭이나 두어 명의 노비도 없이 그저 온 식구가 월봉(月俸)으로 겨우 입에 풀칠한다고 했습니다.” 했다.상이 이에 답하기를 “4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면서 몇 칸 초옥에 살며 바람과 비도 가리지 못한다니, 그의 청백한 삶이야말로 옛날에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그를 경모했던 것은 그의 공덕(功德) 때문만이 아니다. 이 공(李公)의 맑고 검소한 삶의 자세를 여러 관료들이 본받는다면 백성이 곤궁하게 될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의 검소한 덕행은 또한 높이 표창하여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해당
도(道)로 하여금 정당(正堂)을 지어 주게 하고 해당 조(曹)로 하여금 무명 이불과 흰 명주 요를 주게 해 그의 높은 정신이 이어지도록 하라.” 했다. 

원익은 1634년(인조 12) 여든여덟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때도 집이 가난해 상을 제대로 갖춰 치르지 못하니, 인조가 관재의 여러 도구를 보내고 세자가 조문했다.

작은 키 때문에 다른 대신들 사이에 서 있으면 잘 보이지 않아 왕이 자리에서 일어서야 겨우 얼굴이
보일 정도였다는 이원익. 그러나 그는 작은 체구와 병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치적을 쌓아 인심을 얻었고, 전쟁 중에는 전공을 세워
나라를 구했다. 또한 평생을 강직하고 청렴하게 살았고, 바르고 소신 있는 정치를 했다. 또한 당색에 관계없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서인인
이항복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나는 매사를 수반(首班, 이원익)의 재결에 따라 행한다.”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오리 정승’이라는 호칭은 명재상의 대명사로 칭송받고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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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항복과 이덕형,이원익        2017.10.15.일요일,맑음

오성 이항복; 생졸; 1556~1618
한음 이덕형; 생졸 1561~1613)         

인품이 넉넉하고 남다른 우국충정과 도량을 지닌 명신이요, 외교가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인사들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풍파에 휩쓸리고 비난에 시달렸으나, 이덕형만은 드물게도 입방아에 별로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인물이었다.그가 태어날 때는 나라가 정치적 ·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위로는 연이은 사화가 일어나고 뒤이어 당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 척신(임금과 성이 다르지만 한집안인 신하) 윤원형이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며 날뛰고 있었다.

아래로는 각지에서 지방 호족들이 난리를 일으켰고 도적들이 제멋대로 행동했다.
나주의 토호 김응란과 황해도 의적 임꺽정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역사인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은 어릴 적에 동화나 만화를 통해 오성과 한음의 따뜻한 우정과 유머러스한 장난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오성은 이항복, 한음은 이덕형을 가리킨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항복이 이덕형보다 다섯 살 위였으니 형 뻘이다.

이들은 포천 출신으로 함께 서당에 다녔으며 이항복의 장인이 된 권율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런 탓으로 두 사람은 벼슬길에 나와서도 뜻을 같이해 우정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정치적 노선의 지향도

달리하지 않았고 명나라 외교에도 힘을 보탰다.

이덕형이 벼슬자리에 나와 활동하던 시기, 짧다면 짧은 50여 년 동안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동 · 서의 치열한 당쟁, 정여립의 모반 사건, 대전란인 조일전쟁 등이 연이어졌다.

또 그가 죽을 무렵은 임진왜란(조일전쟁) 뒤에 필연적으로 유발된 사회 전반의 파탄, 광해군의 정치적 마찰, 대외적으로는 명나라가 꺼져 가고 후금이 강력하게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러니 이덕형이 산 기간은 조선조 중기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이덕형은

1580년(선조 13) 20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급제하며 관계에 몸을 담았다.

 

교리 · 대사성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판 겸 대제학이 되었다.

 

31세의 젊은 이덕형은 이때부터 정치가로서의 수완과 외교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동래를 함락시킨 뒤, 파죽지세로 경상도를 휩쓸며 북상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 측에서는 조정의 화전 교섭 제의를 다 물리치고 이덕형만 만나고 싶어 했다.

한양의 벼슬아치들이 허겁지겁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을 때,

 

이덕형은 길을 남쪽으로 돌려 전선에 나가 있었다.

그는 밀양에 내려가서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일본의 배신을 힐책하며 물러 나왔다.

 

일본군은 평양성 함락을 앞두고 또 한 차례 이덕형을 만나자고 제의했다.

이덕형은 종자 두어 사람만을 데리고 회담장소인 임진강 한가운데로 나갔다.

 

일본 측에선 안면 있는 승려 겐소와 야나가와 등이 나와서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비켜 주고 협조해 달라고 강요했다.

 

이덕형은 조금도 굽힘없이 한마디로 거절하고 물러 나왔다.

그는 이때 일본군이 우리나라와 강화를 한다고 해서 물러가지는 않을 것을 간파했다.

 

그는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선조를 정주까지 호위하여 따랐다.

그는 이항복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이덕형은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로 건너갔다. 명나라는 국내의 사정으로 구원병 보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덕형은 명나라가 결국은 구원병을
파견할 것이라고 판단하며 온갖 설득 끝에 친조파인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움직여 끝내 구원병 파견을 성공시켰다.명나라 총대장
이여송의 부대가 압록강에 당도하자, 이덕형이 접반관이 되어 접대를 맡았다.

그는 오만무례한 이여송을 여러모로 달랬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평양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여송이 평양 탈환작전을 벌일 때, 이덕형은 또 다른 막역한 친구요 선배인 평양관찰사 이원익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탈환작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평양 탈환의 성공은 전란 중 처음 기록한 조명 연합군의 승리였다.

 

이덕형은 1593년 병조판서가 되어 전쟁을 지휘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인 1598년에는 38세의 장년으로 우의정에 승진했고, 이어 좌의정에 역임했다.

 

1601년에는 경상 · 전라 · 충청 · 강원도의 사도도체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행하면서 민심
수습에 나섰다.난이 끝난 뒤에 온 나라에 역질과 기근이 돌아 전쟁에 시달린 민중이 괴롭힘을 당했고, 풍기는 극도로 문란해져
있었다. 이때를 당하여 그는 사도의 도체찰사로서 민중의 구호사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지방군대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난이 끝난 뒤
호성공신(扈聖功臣, 난에 선조를 호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들)이 문서에 훈공이 기록될 때, 그의 친우인 이항복과 이원익은 1, 2등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나 그는 애써 사양했다. 사실 그는 잠시 왕을 호종했을 뿐 그의 뜻은 언제나 전선을 달리거나 명나라에서 교섭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할 일을 다 했을 뿐, 훈공이 기록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BR><BR>다른 각도에서 보면 호성공신을 서둘러 녹훈한
것은 순서도 틀렸고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 선조 자신이 북쪽으로 파천할 때 민중은 돌을 던지면서 저항의 기세를 보였다. 전선으로 달려가야 할
벼슬아치들이 북쪽 안전지대로 도망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도 난중에 임금을 모셨다고 하여 내시들을 공신으로 올리면서도 정작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죽어 간 장수들은 뒷전으로 밀어 놓았다.

 

이덕형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마침내 1602년 이덕형은 정치가로서나 벼슬아치로서 최고의 영록인 영의정이 되었다. 이덕형은 4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전쟁으로 피폐된 나라를 바로잡기에 힘썼다.

 

그는 인맥으로는 남인 계열에 들었으나 당색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정직하고 바른 정사를 폈다. 이 과정에서 친구 이항복의 협조가 그를 받쳐 주었다. 그 뒤 이덕형은 잠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그는 광해군이 여러모로 빚어내는 마찰을 몸소 겪으면서 관계에 있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덕형은 마침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벼슬이 박탈되는 삭직(削職)의 아픔을 겪었다. 1613년 대북파의 충동에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모하려 했다. 이덕형은 이원익 · 이항복과 함께 이를 크게 반대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는 곧장 행장을 꾸려 양근(楊根)에서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그가 살던 시대는 힘든 일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순탄한 길을 걸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는 현관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온갖 현관을 지냈으며, 탁월한
지도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주위는 늘 그에게 심복했고, 권모술수형 정치가가 아니면서도 당시 세상은 늘 그의 편에 서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인간적 풍모와 원만한 성품 탓이었다. 친구 이항복이 명신 권율을 장인으로 두어 부러움을 샀다면, 이덕형은 영의정을 지낸 북인 이산해(李山海)를
장인으로 두었다. 관계에서는 이산해의 보이지 않는 권위에 힘입은 바도 컸다.“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임진왜란 때는
뛰어난 선비들이 널려 있었다.

 

임진왜란을 치러낸 첫째 공로자로 서애 유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을 꼽는다. 그 다음은 3리(李)라고 한다. 3리란
이원익 · 이항복 · 이덕형을 말한다. 이 세 사람은 각기 개성과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 가운데 이원익이 맏형이었다.

 

 

이원익(1547~1634)은 체구는 작으면서도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솔직 대담성, 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항복(1556-1618)은 기지와 해학, 재기발랄함과 명민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을 사랑하고 인정이 넘치는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이덕형(1561~1613)은 위풍이 당당하고 언변이 뛰어났으며, 언제나 상대에게 호감을 주면서 상대를 압도했다.

이 세 사람은 남다른 교분을 지녔고, 또 영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이원익은 오리(梧里) 정승으로 통했고, 이항복은 오성(鰲城) 대감으로 불렸다. 이덕형은 이항복과는
한 스승 밑에서 함께 학문을 닦은 벗이었다. 이덕형은 세 사람 중 나이가 제일 적으면서도 먼저 높은 벼슬을 얻었고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은 이덕형이 죽은 5년 뒤, 인목대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북청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이원익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홍천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뒤 영의정에 추대되었고,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고 난 뒤 죽었다.

세 사람의 나이는 이원익,이항복,이덕형 순이었으나 죽은 연대는 이덕형,이항복,이원익 순이다.

그들은 인생관과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은 같았으나 태어나고 죽은 순서는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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