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조 이자춘       작성일자; 2007.06.12.화요일,맑음

 

생졸;1315년~1361년1월

본관; 전주 

능;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한 정릉릉,의혜왕후의 화릉도 같은 묘역에 위치해 있다.

 

이자춘은 원나라의 지방 관직인 천호로 있다가 1356년 고려가 쌍성 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여

고려의 병마사,평정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고 조선 건국 후 아들 이성계에 의해 환왕으로 추존되었다.

 

이자춘은 형인 이자흥 마저 연이어 사망하자 어린 조카인 이교주를 대신하여 원나라의 천호를 세습받아

재직하였고,원나라의 후원에 힘입어 이복 동생의 외척, 조씨 가문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습직했으나,

그 후 원나라의 정책에 의하여 타격을 받게 됨에 따라 점차 원나라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이자춘은 원나라의 다루가치(원의 관직)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이 쌍성 총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동조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다.

이때 원,명나라 교체기에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반원 정책을 추진하던 고려 공민왕은

동북면쌍성총관부와 연결되어 있는 친원 사대파인 기씨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유이민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자춘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이자춘은 1335년,고려에 투항하여 소부윤의 관직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유친우와 더불어 동북면을 협공하게 하여 쉽게 이 지역을 점령하여 원의 간섭기 이래 빼앗겼던 동북 영토를

99년 만에 회수하였다.

이로써 그는 그동안 뿌리깊게 대립하였던 친원 세력인 조소생을 제거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저택이 하사 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기반이었던 동북면 떠나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이후 개경에 머무른 지 1년 만에 그가 동북면으로 돌아 가려하자 고려의 조정을 배반할 것임을 들어 그의

동북면 귀환을 대신들이 반대하였으나,공민왕은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병마사로 임명하여,그는 다시 영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4년 뒤인 1361년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문하시중에 증직 되었고,

조선 건국 후 아들인 태조에 의해 환왕으로 추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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