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석 이민우                      2019.12.27.금요일,맑음

인석 이민우(생졸; 1915년9월5일~2004년12월9일) 는

제4·5·7·9·10·12대 국회의원으로 신민당 총재 권한대행,신민당 부총재,대한민국 헌정회

원로 자문회의 위원,자유민주 민족회의 고문을 지낸 정치인다.    


1915년9월5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아내 김동분과의 사이에서 아들 김상용,

   김상래,김상호,김상렬 등 4남 4녀를 두었다.

1940년,일본 메이지대학(명치) 법학과를 입학하여,이듬해인 1941년에 중퇴하였다.

1946년,'충북신보' 총무국장 겸 영업국장을 거쳐,

1948년, 청주 시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신익희·조병옥·김성수 등으로 연결되는 민주당 구파에서 활동하면서,민주당 중앙위원 겸

   충북도당 부위원장과 청주시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제4대 민의원으로 선출된 후,

1960년, 5대 국회의원,1967년 7대 국회의원,1973년 9대 국회의원,1979년 10대 국회위원,

   1985년,12대 국회의원에 선출된 6선의 정계 거목이었다.

1960년,신·구파 갈등 과정에서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하자 이에 가담했다.

   신민당에서는 유진산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며,원내 부총무를 지냈다.

1965년,제3공화국 최초의 통합 야당인 민중당에서는 조직 국장과 당무회의 부의장을 역임.11967년,통합 야당 신민당에서는 정무 위원,당기 위원장,충북도 제1지구당 위원장,원내 총무,

   중앙상임 위원회 의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973년, 9대 국회에서 신민당이 김영삼의 강경파와 이철승의 온건파로 대립할 때,

   김영삼 편에 서서 정치적 동지 관계를 형성했다.

   이 인연으로 신민당 총재 권한대행,민주산악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1979년,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6년12월24일, 민주화 7개항이 실현되면 국민은 물론 야당까지도 내각제가 장기집권

   음모라 생각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자 회견을 하였다.

   전두환 정권이 주장하는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김영삼과 김대중계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이

   와해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민족통일 국민운동 중앙위원,대한민국 헌정회 원로 자문회의 위원,자유민주 민족회의 고문, 대한민국 건국5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명예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의 보수야당인 민주당의 분열과 통합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한명이다.

‘어진 돌’이라는 뜻을 지닌 인석()이라는 호에 걸맞게 중후한 인품과 서민적 풍모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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